[현장] 부조리 숨던 세탁방이 열린 라운지로…병영 바꾸는 '공간의 힘'

  • 양평 공간력 시범부대 가보니…세탁 기다리는 시간도 독서·소통으로

  • 20여년 된 건물에 40억원 투입…신축 대신 보수로 예산 효율 높여

  • 병사·간부 의견 설계에 반영…온전한 휴식에서 전투력 강화 출발

사진육군 제공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육군 공간력 시범부대의 세탁방 모습. [사진=육군 제공]
지난 14일 찾은 경기도 양평의 육군 공간력 시범부대. 세탁방에는 빨래를 기다리며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세탁 기능에 휴식과 소통을 더한 오픈라운지 형태다. 외부의 눈길이 닿기 어려운 구석진 공간으로 여겨지던 군 세탁방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흔히 군에서의 세탁방은 폐쇄적이고 음침한 분위기에서 부조리가 발생하기 쉬운 공간이기도 했다. 이번 개선은 이러한 공간들을 장병들이 편하게 드나들고 머무는 곳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세탁방의 변화는 육군이 추진하는 '공간력' 사업의 방향을 보여준다. 장병이 생활하고 일하는 공간의 구조와 쓰임을 바꿔 부대의 소통과 단결을 높이고, 충분한 휴식과 효율적인 전투 준비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다.

공간력 혁신 사업은 지난해 9월 김규하 육군참모총장 지휘서신을 통해 시작을 알렸다. 장병이 사용하는 공간을 재편해 복무 환경을 개선하고 전투력 발휘 여건을 높이는 사업이다. 육군은 지난해 7개 시범부대를 지정했으며, 시범 사업을 토대로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생활관에서도 공간을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구역을 나눈 변화가 확인됐다. 실사용자인 병사들의 의견과 미래 분대 편제를 고려해 구성한 6인실에는 개인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파티션이 설치됐다. 또 장구류는 별도의 전투 준비 공간에 보관하도록 했다. 취침 공간에 전투준비 기능까지 몰아넣던 방식에서 벗어나 생활관의 휴식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간담회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쉬는 장병과 다른 활동을 하는 장병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공간별 기능을 구분했다. 휴식할 때는 온전히 쉬고, 재정비와 재충전을 마친 뒤 훈련과 임무에 집중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세탁방 역시 이런 맥락에서 재구성됐다. 세탁시설의 관리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기다리는 시간을 독서와 대화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훈련 후 빨래와 휴식 등 일상생활의 불편을 줄이는 일이 결국 마음껏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부대 안에서 제대로 쓰이지 않던 유휴공간은 체력단련장 등으로 바꿨다.

간부들의 업무공간도 손봤다. 연구공간이 부족해 탈의실까지 활용하던 여건을 개선하고 간부연구실을 마련했다. 중대별로 나뉘어 있던 행정반은 통합행정반으로 재편했다. 업무를 수행하는 간부들이 한 공간에서 소통하도록 해 협업 여건을 높이려는 시도다.

이 같은 공간 구성은 실제 사용하는 장병들의 의견에서 출발했다. 정해진 시설기준과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위에서 내려보내던 방식에서, 병사와 간부의 요구를 듣고 설계에 반영하는 상향식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7곳의 시범사업 모두 이 같은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휴식공간과 업무·전투준비 공간을 분리해 회복과 임무 집중도를 높인다는 공통 원칙 아래, 구체적인 공간 구성에는 부대별 자율성을 부여했다. 임무와 생활 방식이 다른 부대에 동일한 형태를 적용하기보다 각 부대의 특성을 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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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공간력 시범부대의 휴식 공간.[사진=육군 제공]
이번 사업에서 주목할 대목은 기존 건물의 활용이다. 양평에 위치한 시범부대는 20여년 전 지어진 노후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짓는 대신 4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했다. 콘크리트 건물의 남은 수명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보수하면서 내부 공간의 기능과 배치를 바꿨다.

육군에 따르면 건물을 새로 짓는 데는 한 동에 약 200억원이 소요된다. 시범부대는 기존 건물을 활용해 신축보다 적은 예산으로 생활·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방식을 택했다. 건물의 구조는 활용하고 장병의 생활에 맞춰 내부를 재구성해 시설 개선에 드는 재정 부담을 줄인 것이다.

7개 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시범사업에 확보된 예산은 총 200억원이다. 당초 300억원 규모로 추진했으나 실제 확보액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군은 앞으로 성과지표 등을 통해 사업 효과를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추가 예산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시범부대 7곳의 공사는 11월 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시범부대의 변화는 세탁방처럼 익숙한 공간의 쓰임을 다시 묻는 데서 시작됐다. 빨래를 기다리는 곳은 소통의 공간으로, 장구류를 함께 보관하던 생활관은 온전한 휴식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확보한 휴식과 소통의 여건을 실제 복무 만족도와 전투 준비 역량 향상으로 연결하는 것이 공간력 사업의 다음 과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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