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렬의 인사이트] 투자는 지금, 핵농축은 나중 …美의 이상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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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렬 전 대사: 필명 이창천]


외교에서 속임수는 거짓말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의 절반만 크게 말하고 나머지 절반을 감추는 방법도 있다. 아직 주어지지 않은 권리를 이미 확보한 것처럼 설명하고, 몇 년 뒤 다시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지금 받은 선물처럼 선전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요구하는 대가는 당장 받아 내면서 자신의 의무는 조건과 절차 뒤로 미룬다. 최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체결한 원자력협정에는 바로 이런 계산이 들어 있다.
 
이런 거래는 집을 사면서 계약금과 잔금은 오늘 모두 치르되 소유권 이전은 몇 년 뒤 상대방이 다시 심사해 허락할 때 하겠다는 계약과 비슷하다. 매수인이 받은 것은 집이 아니라 ‘나중에 이전받을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이미 집을 넘겨받은 것처럼 포장한다면 계약의 실질은 사라지고 홍보문구만 남는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의 이름보다 그 권리를 언제, 누구의 허가 없이 행사할 수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1972년 상하이 코뮤니케도 한 문장을 서로 다르게 읽도록 만든 문서였다.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의 중국인들이 하나의 중국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acknowledges)”고 적었다. 중국은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고, 미국은 중국의 주장을 들었을 뿐 승인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상하이 코뮤니케가 말장난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했고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열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다. 대만 문제는 미뤄졌지만 양국은 서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 알고 있었다. 모호한 문장 뒤에 분명한 국가전략이 있었다. 그래서 그 문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국제질서를 움직였다. 외교문서의 여백을 이용하려면 그 여백을 채울 힘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
 
미·사우디 원자력협정도 발표 직후 실제 내용보다 훨씬 크게 보도됐다. 주요 언론은 사우디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의 길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읽으면 미국이 사우디에 한국도 얻지 못한 핵연료주기 권한을 내준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협정에서 사우디가 얻은 분명한 이점은 있다. 2009년 미·UAE 원자력협정에는 UAE가 자국에서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포기조항이 들어갔다. 미·사우디 협정에는 그런 영구 포기조항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의 선택 가능성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는 사실과 실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다. 미국과 언론은 그 차이를 흐려 사우디가 특별대우를 받은 듯한 인상을 만들었다.
 
농축에 관한 보도 내용을 자세히 보면 속임수의 구조가 더 분명해진다. 사우디가 자체 기술로 시설을 건설하고 독자적으로 운전하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다. 2년 동안 필요성과 경제성을 공동으로 검토한 뒤 다시 결정하고, 시설을 짓더라도 미국 기업이 사우디 영토에서 운영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우디가 원심분리기 기술과 운전정보를 넘겨받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 시설을 통제한다면 그것은 사우디의 농축권보다 미국 원자력기업의 해외사업에 불과하다.
 
재처리는 더욱 불분명하다. 사우디가 정해진 범위 안에서 미국의 건별 허가 없이 계속 농축하거나 재처리할 수 있다는 포괄적 사전동의(comprehensive advance consent)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추가 승인과 별도 합의가 필요하다면 현재 사우디가 가진 권한은 없다. 앞으로 미국이 동의할 수도 있다는 기대만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 기대를 실제 권리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그 대가로 사우디에는 당장 이행해야 할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핵연료주기 문제에서는 이 구분이 특히 중요하다. ‘협의할 수 있다’, ‘조건이 충족되면 승인할 수 있다’, ‘정해진 범위에서는 별도 승인 없이 할 수 있다’는 세 문장은 전혀 다른 권리를 뜻한다. 첫째는 대화를 시작할 권리이고, 둘째는 상대방이 최종 열쇠를 쥔 조건부 권리이며, 셋째에 이르러서야 실제 행위의 자율성이 생긴다. 그런데 정치권과 언론은 이 세 단계를 흔히 ‘길이 열렸다’는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바로 그 순간 외교협상의 조건부 문장이 국내정치용 성과로 둔갑한다.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도 본질적으로 똑같다. 한국은 20% 미만 저농축과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을 연구하고 협의할 절차만을 얻었다. 기술적 타당성과 경제성, 비확산성을 검토한 뒤 미국의 서면동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 정부는 당시 농축과 재처리의 길이 열렸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 손에 넣은 것은 미국에 다시 허락을 구할 통로였을 뿐이다. ‘나중에 허락할 수도 있다’는 말은 지금은 안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우디가 지금 얻었다는 것도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만 놓고 보면 그 수준을 넘지 않는다.
 
2025년 11월 한·미 공동팩트시트 역시 미국이 한국의 민수용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질 절차를 지지한다”고 적었다. 그 문장 앞에는 현행 한·미 원자력협정과 미국 법률을 따른다는 제한이 붙어 있다. 미국이 포괄적 사전동의를 주겠다고 약속한 문서가 아니다. 협의해 볼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한국 언론과 정부가 이를 농축과 재처리 권한 확보로 설명한다면 사우디 협정을 부풀린 것과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는 셈이다.
 
사우디와의 협정에 관한 미국의 목적은 곧 드러났다. 트럼프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수교하고 아브라함협정(Abraham Accords)에 가입해야 원자력협정도 성립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사우디에 제공하겠다는 것은 몇 년 뒤 미국의 판단에 따라 허용할 수도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그 대신 사우디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중동질서를 바꾸는 즉각적이고 되돌리기 어려운 외교적 선택이다. 미국은 확정되지 않은 약속을 크게 평가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가는 먼저 받으려 한다. 이번 협정이 의도하는 속임수의 첫 번째 층이다.
 
사우디도 그 속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사우디가 미국 언론의 과장된 보도를 굳이 부인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에는 미국이 사우디의 핵연료주기 선택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이란이 핵무장에 다가가면 사우디도 대응할 수 있다는 경고로 생각하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조정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권리를 받아냈다고 홍보할 수도 있다. 미국이 만든 과장을 사우디가 다시 이란 압박과 국내 설득에 쓰는 것이 두 번째 층의 속임수다.
 
외교의 승패는 발표문에 적힌 문장보다 실제 이행구조에서 갈린다. 누가 먼저 대가를 지급하는가, 누가 최종 승인권을 갖는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상대가 무엇을 중단할 수 있는가를 봐야 한다. 상하이 코뮤니케에는 양국의 전략이 있었고, 미·사우디 협정은 미국과 사우디가 서로의 계산을 알면서도 같은 과장을 각자의 목적에 이용하는 거래다. 발표된 이야기만 따라가면 외교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한국의 공동팩트시트도 같은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 미국의 별도 승인 없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승인을 미룰 경우 한국이 중단할 수 있는 상응 조치가 무엇인지가 핵심이다. 이 장치가 없다면 협상력은 미국 쪽에만 있는 것이다. 지금 미국은 대미 전략투자의 상한선인 2000억 달러를 넘는 추가적인 투자를 압박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미국은 한국을 마치 그들의 ‘머니 머신’처럼 이용해 먹을 심산인 것이다.
 
한국은 이미 대미 투자와 조선협력, 통상문제, 방위비, 무기구매에서 미국이 요구한 모든 것을 내주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이 부담해야 할 몫부터 구체적인 숫자와 일정으로 확정해 놓고, 자신이 약속한 농축과 재처리 문제는 ‘절차를 지지한다’는 말로만 남겨 두었다. 한국에서 챙길 것은 먼저 챙기고 그들이 이행할 의무는 뒤로 미룬 구조다. 이를 동맹국의 선의로 받아들여 미국의 속임수에 순진하게 놀아나서는 안 된다. 이제 와서 미국의 추가 압박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미 받아 간 대가에 상응하는 의무를 미국이 이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공동팩트시트의 내용을 서로 떨어진 약속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투자와 산업협력은 미국의 원자력협력, 핵추진잠수함 연료 공급, 통상조치 이행과 한 묶음으로 다뤄야 한다. 미국이 자신의 의무를 미루면 한국도 아직 집행하지 않은 투자와 협력사업을 늦추거나 재검토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합의 전체의 효력을 다시 묻겠다는 태도도 보여야 한다. 이미 모든 것을 내주고 상대의 선의를 기다리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대에게 우리도 더 이상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명실상부한 진짜 대한민국이다.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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