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여파로 개봉이 늦어지며 5년 만에 관객들과 만나게 된 '비광'은 톱스타 부부 중구(류승룡 분)와 남미(하지원 분)가 갑자기 나타난 중구의 딸 동주(김시아 분)로 인해 파경을 맞은 뒤 8년 후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린 동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찐한 가족 연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된 이지원 감독은 복잡한 소회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정말 전쟁통에 애를 잃어버린 엄마가 만신창이가 된 채 찾아다니다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그 아이가 저 멀리서 쩔뚝거리며 뛰어오는 걸 본 느낌이었어요. 너무 반갑고 눈물도 나는데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거예요. 다시 편집본을 펼쳐봤을 때 창피한 부분도 보였고, 제가 나이를 먹고 드라마 한 편을 하면서 성장한 지점도 보였어요. 여러 마음이 공존했지만 그래도 애타게 찾아다녔던 자식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어요."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후반 작업의 핵심은 단연 '덜어내기'였다. 방대한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관객의 호흡을 고려한 치열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지원 감독의 연출적 인장은 언제나 입체적이고 생생한 캐릭터 구축에서 출발한다. 전작들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실제 누군가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인물들을 탄생시키는 데 각별한 공을 들였다.
"저는 영화를 만들 때 제일 공을 들이는 부분이 캐릭터 구축인 것 같아요. 그건 '미쓰백'도, '클라이맥스'도, '비광'도 마찬가지예요. 영화에 나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삶을 겪어왔는지, 자주 내뱉는 단어는 무엇인지, 성격은 어떤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다 생각해요. 그런 걸 배우들과 상의하고 만들어가기 때문에 실제 살아 있는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 것 같아요."
특히 극에 묵직한 현실감을 불어넣는 기식과 지숙 등의 캐릭터는 감독의 실제 기억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깊은 관찰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됐다.
"기식이라는 캐릭터는 저희 친할머니 이름이 기식이었어요. 완전히 똑같은 일은 아니지만, 최대한 친할머니와 비슷한 캐릭터를 만들려고 기억을 많이 끄집어냈어요. 할머니가 실제로 했던 말들도 떠올렸고요. '우리 집 귀한 자식이 어디 나 이런 데'라든가, '절대 기죽으면 안 된다' 같은 말들이 실제 기억에서 나온 거예요. 김선영 선배가 맡은 지숙 캐릭터도 제가 너무 좋아해요. 정말 어딘가 있을 법한 K-고모 같은 느낌이잖아요. 기세가 있고 다혈질이고 성질은 불같아 보여도 속은 깊고, K-장녀 같은 면이 있어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현실적이되, 외형이나 비주얼에는 영화적인 과장과 미학을 더하는 것 역시 이지원 감독 작품의 중요한 문법이다.
"제가 '미쓰백' 때부터 그런 식으로 작업해온 것 같아요. 성격이나 말, 행동은 리얼한데 외형은 영화니까 영화적인 비주얼을 구축하려고 해요. 실제 저 사람들이 입을 것 같은 옷에서 하나 더 한다거나, 행동을 하나 더 한다거나, 표현을 하나 더 얹는 식이에요. 리얼한 사람들이 리얼한 외형 그대로 나오면 다큐멘터리잖아요. 관객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오는데, 미술적으로나 의상적으로나 분장적으로나 연기적으로 재미거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얼함과 영화적 상상력 사이의 외줄 타기를 즐긴다는 그는 자신만의 연출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소신을 드러냈다.
"저는 아예 리얼한 것도 제가 못하는 부분이고, 아예 시네마적인 것도 못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항상 경계에 있는 캐릭터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저 역시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외줄타기를 하는 지점이 어떤 때는 장점으로 발휘되고, 어떤 때는 단점으로도 보이는데 저는 그런 상태에 놓인 사람인 것 같아요. 류승룡 선배가 '이제는 일을 걸어도 알겠다'는 식으로 말씀해주셔서, 그런 것들이 인장이 되어버렸구나 싶었어요. 앞으로는 의식하지 않아야 하는데, 못할 것 같아요. 어쨌든 제 취향이니까요."
공간과 소품 하나에도 캐릭터의 서사와 감정을 빼곡히 담아내는 미장센은 '비광'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미술적인 건 의도한 것 같아요. 할머니 집 세트도 옛날 할머니 집을 많이 따왔고, 장소 섭외도 정말 공을 많이 들여요. 캐릭터들이 어디서 봤던 사람처럼 느껴져야 하듯이 장소도 우리가 어디선가 봤던 장소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하천을 따라가면서 크레딧이 올라가잖아요. 거기서 인생의 굴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저렇게 빽빽하게 모여 살고 있고, 천 옆으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굽이치면 그다음에 뭐가 나올지 모르는 공간이잖아요. 장소에도 표정이 있었으면 좋겠고, 장소가 캐릭터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해요."
비극적인 사건과 나락으로 내몰린 인물들을 다루면서도, 이지원 감독이 작품의 끝에 도달하는 지점은 언제나 결핍을 채우는 온기와 희망이다.
"저는 '미쓰백'에 비하면 훨씬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둡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제가 굴곡진 인생이나 나락 간 캐릭터들을 많이 다루지만, 그 끝에서는 항상 희망을 찾는 사람인 것 같아요. 관객들이 극장에 와주시는 게 너무 감사해서, 제가 고구마를 드렸다면 나가실 때는 그걸 다 소화시켜드리고 옷도 하나 입혀드려서 보내드리고 싶어요. 사람 때문에 힘들고 파멸을 맞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에게 희망이 있고 끝에는 온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복수와 연대의 방식 역시 이러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과응보의 감각 위에서 치밀하게 설계됐다.
"저는 인과응보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은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보통 복수는 장르 영화에서 많이 다루잖아요. '비광'은 휴먼 드라마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작품이기도 해서, 그 안에서 어떻게 복수를 녹여낼지가 고민이었어요. 중구가 자기 원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희생이기도 하고요. 중구가 하지 못하는 복수를 나머지 가족들이 해주는 게 그들의 역할이라고 봤어요. 기식, 남미, 지숙, 다른 가족들까지 모두가 동주 앞에서는 비광인 거예요. 자신이 가진 패를 하나씩 꺼냈을 때 비로소 연대가 완성되고, 그게 서로에 대한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의 말미 이지원 감독은 관객들이 '비광'을 마주할 때 겉모습의 어둠에 겁먹지 말고 편안하게 다가와 주기를 당부했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겉으로 봤을 때 어두워 보이는 모습에 겁먹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런 영화만은 아니거든요. 캐릭터들이 처음에는 다혈질이고 무서워 보여도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들이잖아요. 삶의 굴곡진 인생을 다루지만 그 안에는 코믹 감성도 있고, 신파는 아니지만 끝에는 아련한 희망이 있어요. 영화관에서 잠시 저런 가족을 닮은 가족을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나오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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