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76) 쇠를 살짝 건드려 금으로 만들다 - 점철성금(點鐵成金)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오디세이' 열풍이 지구촌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개봉 한달이 채 되기도 전에 15억불, 2조 원이 넘는 흥행 수입을 올렸고 영화의 무대가 된 유적지와 촬영지는 오버투어리즘의 몸살을 앓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압도적 박스오피스 1위를 이어가며 개봉 33일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흥행 돌풍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뭐니뭐니 해도 원전의 힘이 크다. 영화명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뒷세이아'의 영어식 표현이다. 서양 문명의 원천 그리스·로마 신화는 출판계 불변의 스테디셀러일 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설령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지 않았어도 트로이 전쟁이 뭔지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가 누군지 다들 안다. '오뒷세이아'는 2018년 BBC 설문조사에서 '세계에 영향을 준 100대 이야기' 1위에 올랐다. 이 위대한 이야기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웬만해선 마다하기 힘들다. 놀런은 사상 처음으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필름으로 촬영했다. 이게 집에서 편하게 보는 OTT 열풍 속에서 오히려 더 커진 프리미엄 경험에 대한 욕구와 맞아떨어져 초반 흥행 돌풍을 주도했다. 아이맥스의 성지라는 용아맥(용산CGV 아이맥스관)은 예매전쟁에 암표까지 등장했다. 감독의 제작 성향이 한국 관객의 지적 호기심과 잘 맞는다는 분석이 있을 만큼 전작들을 통해 '블록버스터의 장인'으로 입지를 굳힌 감독의 이름값도 톡톡히 한몫했을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10년간의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기본 틀이다. 서양문학사에서 모험소설의 기원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오디세우스는 괴물과 마녀를 물리치고 요정의 유혹도 뿌리치는 등 영웅적 기개와 지혜, 인내심을 발휘하여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집을 비운 동안 아내 페넬로페를 넘보며 패악질을 일삼던 108명의 구혼자들을 일거에 몰살시키고 행복도 되찾는다. 한마디로, 트로이 전쟁 영웅의 고진감래 해피엔딩 스토리다. 

놀런은 호메로스의 원작을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문제의식과 사유를 담아 재해석했다. 그 핵심은 오디세우스의 '죄의식'과 '크세니아(Xenia)'다. 크세니아는 영화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키워드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선물로 위장해 트로이를 속이고 전쟁을 끝낸 자신의 계책이 '크세니아'를 어긴 것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제우스의 법'으로 불리는 크세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환대(hospitality)' 문화로, (변장한 신일지도 모르니) 나그네를 환대하되 나그네도 주인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상호 신뢰의 원칙이다. 고향 이타카에서 구혼자들이 성안으로 몰려와 곳간을 축내고 연일 먹고 마시며 행패를 부려도 어쩌지 못하는 것도 이 크세니아 때문이다.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목마를 만든 오디세우스나 주인을 존중하지 않는 구혼자들이나 제우스의 법을 악용하고 무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놀런의 시각은 전작들을 통해 드러난 그의 성향으로 볼 때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국제 질서의 상식을 깨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은유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대 그리스와 트로이는 동일한 신앙 체계하에서 살았다. 똑같이 신들의 왕 제우스를 받들었고,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은 트로이에도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제물이자 평화를 위한 선물이라고 믿은 트로이 사람들을 속이고 승리를 도둑질했다. 트로이 성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과 파괴, 약탈의 기억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 식인 거인을 눈 멀게 했기 때문에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 고생을 했다고 기록했지만, 놀런은 떳떳하지 못한 승리를 한 오디세우스에게 내려진 인과응보라고 해석했다. 

오디세우스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뀜에 따라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은 지략이 뛰어난 전쟁 영웅의 귀향 모험담에서 신의 법을 어기고 인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비윤리적 선택을 한 죄인의 성찰록으로 바뀐다. 파괴와 살육. 모든 것을 앗아가는 상실의 고통. 전쟁이란 명분으로 이름다운 한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는 회의감이 오디세우스를 짓누른다.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도 뼈아픈 일침을 날린다. 추잡하고 원초적인 욕구들로 세상을 유린해 왔다고. 놀런이 던지는 반전(反戰)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회한 가득한 그 여정에서 전쟁을 함께 치른 부하들도 모두 잃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모두 처단한 후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아내와 함께 서쪽 미지의 땅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 망자가 된 부하들을 기리기 위해서. 원작의 해피엔딩을 비틀고 관객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놀런 감독의 변주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도 놀런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 때문이라는 호메로스의 신화 속 낭만적 서사를 따르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신들의 게임으로 풀이했지만, 신화와 역사를 분리하고 인간의 의지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어떤 이념이나 도덕 문제, 또는 우연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역학관계 때문이라고 보았듯 트로이 전쟁 역시 경제 패권 다툼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납치를 당했든 사랑의 도피를 했든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버린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서라는 건 명분일 뿐 진짜 이유는 무역항로에 대한 트로이의 통제권을 빼앗으려는 아가멤논의 욕망이었다는 거다. 

놀런은 출정 전 아내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오디세우스의 입을 통해서 투키디데스의 관점을 채택했다. 훗날 헬레네 역시 자신의 얼굴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비꼬는 남편에게 같은 논리로 반박한다.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좁고 긴 바닷길은 당대의 전략 물자인 주석과 구리, 곡물 등이 오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 항로의 통제권을 쥐고 트로이는 엄청난 부(富)를 쌓았다. 트로이가 1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트로이인이 특별히 용맹해서가 아니라 양 진영의 경제력 차이와 관련이 있다는 게 투키디데스의 분석이다. 실제로 경제력이 시원치 않았던 그리스 원정군의 장비와 보급에 문제가 많았다. 항로 통제권을 탐낸 아가멤논의 욕망이 일면 이해가 된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그 바닷길은 당대의 호르무즈 해협이었다. 

위대한 고전을 영화화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감독의 로망이자 용기 있는 도전일지 모른다. 놀런의 '오뒷세이아' 변주는 북송의 문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시 창작론을 연상시킨다. 시와 서예에 두루 능해 시서쌍절(詩書雙絕)로 불린 황정견은 "과거의 문장이나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학문을 도야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며 "선인의 문장을 시재(詩材)로 삼되, 거기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신을 더하는 것은 마치 쇠를 터치하여 황금으로 바꾸는 것(點鐵成金)과 같다"고 했다. 

'점철성금'은 기존의 익숙한 소재를 가져오되 창작자의 미학적 독창성을 더해 새로운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재창작을 뜻한다. 놀런은 3천 년 동안 수없이 반복 소비되며 트로이 전쟁 영웅의 모험담으로 굳어진 신화라는 원석(鐵) 위에 '영웅의 죄의식'이라는 독창적 관점을 얹어(點) 관객들의 보편적 상식을 전복하고 시대와 호흡하는 걸작(金)으로 만들었다. 

'오디세이' 열풍은 스크린 밖에서도 뜨겁다. 관련 도서 판매량과 검색량이 급증했다. 12년 전 SF 영화 '인터스텔라'로 천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인의 우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바 있는 놀런이 이번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학습 욕구에 불을 질렀다. 원작의 명성이 영화 흥행에 도움을 주고 영화의 흥행은 다시 원작의 성가를 높인다. 놀런의 작품들은 길다. 대체로 세 시간에 육박한다. '오디세이'의 러닝타임은 172분. “영화의 길이는 반드시 인간 방광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히치콕 감독의 말이 무색하다. 놀런은 늘 할 얘기가 넘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시대의 거장이 만든 걸작을 감상하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방광이 받을 압박감을 불사하고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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