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전략학]
인공지능(AI) 시대의 대격변 속에서 한국과 대만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당연히 글로벌 IT 생태계의 핵심축으로 세계적 위상을 만끽하고 있지만 동시에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이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면서 한국과 대만은 각각 '메모리 강국'과 '파운드리 강국'이라는 서로 다른 좌표에서 동시에 시험대에 올라 있다.
한국과 대만에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안보와 외교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특히 미·중 전략경쟁과 기술 패권 경쟁의 격화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지역 안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격화되는 미·중 경쟁과 급변하는 AI 반도체 패러다임에서 이제 한국과 대만이 '제로섬(Zero-Sum)' 방식의 경쟁을 지양하는 전략적 협력 여지가 없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발전 과정이나 경쟁력 구조가 뚜렷이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약점도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 지나치게 편중된 구조는 경기 변동에 극도로 취약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도 시장지배자인 대만 TSMC와 격차를 줄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팹리스로 불리는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 시장점유율 역시 1% 안팎으로 미미하다. 더욱이 소재·부품·장비의 해외 의존도, 특히 첨단 노광장비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 확보 경쟁에서도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으며, 산업 전체의 고용 파급력이 제한적이라는 한계도 안고 있다.
반면 대만의 최대 강점은 TSMC를 중심으로 한 파운드리 부문의 초격차 경쟁력이다. TSMC는 전 세계 첨단 공정 파운드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애플과 엔비디아 등 세계 최대 팹리스 기업들의 신뢰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또 다른 파운드리 기업인 UMC도 있고 미디어텍 등 팹리스, ASE 등 후공정 패키징로 이어지는 클러스터는 고객 맞춤형 제조 인프라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 완벽하게 분업화된 생태계 구축은 경기 변동에 영향받지 않는 안정적인 수익 구조와 높은 프리미엄 밸류에이션 인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이 낮아 외부 조달에 의존해야 하며, 산업이 TSMC 한 기업에 지나치게 편중된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위험은 지정학적 요인이다. 양안 관계의 군사적 긴장은 대만 반도체 산업 전체를 위협하는 상시적 리스크다. 반도체 방패론, 즉 ‘실리콘 실드’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 대만 단일 공급망 의존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미국·일본·유럽 등지로 첨단 생산시설을 분산 배치하는 전략도 대만 내 생산 비중 축소와 '실리콘 방패' 효력 약화의 역설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미국이 대중 수출통제를 강화할수록 중국은 ‘과학 기술 자립’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시진핑 체제가 반도체 분야 등을 국가 전략 산업화해 ‘과학 기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중국몽(中國夢)과 맥이 닿아 있다. 특히 상하이 증시에 상장한 메모리 기업인 CXMT(長鑫存儲技術)는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D램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으며, 파운드리 기업인 SMIC(中芯國際) 역시 첨단 공정 기술 확보에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
물론 중국은 여전히 최첨단 미세공정과 EUV 장비 확보에서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CXMT가 이미 DDR4를 시장가의 절반 수준으로 공급하며 구형 DRAM 시장에 진입하는 등 범용 반도체와 성숙 공정 분야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HP·Dell·Asus·Acer 등 글로벌 제조사가 품질 테스트와 협력을 검토한다는 소식은 수요측 신뢰도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지와 자원 투입 지속 가능성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한국과 대만 모두에 중장기적으로 매우 실질적인 위협이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상호보완적 협력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AI 혁명을 주도하는 반도체의 패러다임은 '단품 제조'에서 AI 연산을 위한 핵심 연산장치인 GPU 같은 로직 반도체와 GPU를 운용하는 초고속 HBM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고, 최종재 생산에 첨단 패키징(CoWoS 등) 기술이 결합된 '이종 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대만은 더 이상 날 선 대립각만 세울 수 없는 구조적 교차점에 도달했다. 대만의 TSMC가 아무리 뛰어난 2나노, 3나노 파운드리 공정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한국의 최첨단 HBM 메모리가 원활히 공급되지 않으면 최첨단 AI 칩 생산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반대로 한국 역시 세계 최고의 HBM을 만든다 해도 TSMC의 생태계 및 최첨단 패키징 라인과 매끄럽게 연동되지 않는다면 AI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이미 시장에서는 한국의 메모리 제조사와 대만의 TSMC가 차세대 HBM3E 와 HBM4 개발 및 첨단 패키징 공정에서 기술 협력을 타진하는 실용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격변하는 AI 시대에 반도체 전쟁은 단일 국가나 단일 기업의 힘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한국의 '메모리 초격차'와 대만의 '파운드리·생태계 파워'가 결합하면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보완하는 최강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상호 우위의 기술력을 활용해 글로벌 표준화 및 밸류체인 융합도 도모할 수 있고, 지정학적 공급망 리스크 분산도 협력 대상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국과 대만이 이제 '누가 상대를 넘어설 것인가'를 다투는 치킨게임에서 벗어나 '어떻게 함께 미래 시장을 주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경쟁자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의존적인 '윈윈' 관계를 구축해 AI 반도체 생태계의 차별적 주도권을 지킬 전략적 공존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강준영 필자 주요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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