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 주지를 지내고 대한불교조계종의 개혁을 외쳐 온 명진 스님이 2026년 8월 22일 제주 바다에서 입적했다. 세수 76세, 법랍 52년이다. 평소 즐기던 프리다이빙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에서 수행하듯 숨을 고르고 물속으로 들어갔던 스님은 끝내 다시 이 세상의 호흡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참으로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명진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 지냈던 자승 스님이다. 자승 스님은 2023년 11월 경기도 안성 칠장사 요사채 화재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수 69세였다. 한국 불교의 한 시대를 함께 살았지만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은 종단의 권력과 정치화를 비판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최대 불교 종단의 최고 행정 책임자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봉은사 문제와 조계종 운영을 둘러싼 갈등은 한국 사회 전체가 지켜보는 공개적인 충돌로 번졌다. 명진 스님은 종단 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자승 스님을 비롯한 당시 종단 지도부를 향해서도 날을 세웠다.
갈등은 오래갔다. 명진 스님은 2017년 조계종에서 제적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종단은 종단과 총무원 집행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고, 명진 스님은 오히려 종단 내부의 부도덕과 잘못을 비판한 자신이 징계를 받았다며 맞섰다. 이후 법정 다툼에서 명진 스님 측이 승소했고, 긴 분쟁 끝에 승적 문제도 정리됐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총무원장도 없고 봉은사 주지도 없다. 종단의 권력도 없고 반대파도 없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자승도 없고 명진도 없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이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갔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가 인간에게 던져 온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왜 우리는 그렇게 싸우는가. 불교가 인간을 가장 경계하도록 가르친 것이 탐·진·치(貪瞋癡), 곧 삼독(三毒)이다. 더 가지고 싶은 탐욕, 미워하고 분노하는 진심, 사물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수행자는 평생 이 세 가지 독을 걷어내기 위해 삭발하고 산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절집에도 사람이 산다. 사람이 모이면 조직이 생기고, 조직이 생기면 권력이 생긴다. 권력이 생기면 자리와 이해관계가 생기며, 그곳에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스며든다. 세속을 떠난 수행자라 해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출가란 욕망이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평생 그것과 싸우겠다는 서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스님의 오랜 갈등을 이제 와서 어느 한쪽의 승리와 패배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명진 스님이 모두 옳았다고 말하는 것도, 자승 스님이 모두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불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의 자리를 쉽게 부여하는 순간 또 하나의 집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말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우리가 그렇게 붙들고 사는 지위와 명예, 돈과 권력, 승리와 패배, 사랑과 미움조차 영원한 실체가 아니다.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오늘 내 손에 있는 권력도 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불러주는 직함도 본래 내 것이 아니다.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도 공(空)이고, 봉은사 주지라는 자리도 공이다. 종권도 공이고 개혁이라는 이름조차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또 하나의 색(色)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공은 허무가 아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비웠기 때문에 다시 세상을 껴안을 수 있고, 내려놓았기 때문에 다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나를 비운 자리에 타인이 들어오고, 증오를 비운 자리에 자비가 들어온다. 그것이 반야의 역설이다.
《금강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디에도 집착하여 머물지 말고, 그곳에서 다시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이 한마디를 두 스님의 삶에 비추어 본다.
명진 스님은 개혁이라는 정의에 머물지 않았는가. 자승 스님은 종단이라는 권력과 질서에 머물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 역시 ‘명진은 옳고 자승은 그르다’, 혹은 ‘자승은 옳고 명진은 그르다’는 자신의 판단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금강경은 그 자리마저 떠나라고 한다.
또 이렇게 가르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세상의 모든 인연 따라 생긴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와 같으니 그렇게 바라보라는 가르침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우리가 평생 목숨을 걸다시피 붙잡는 권력도 번개 한 번이다. 명예도 아침 이슬이다. 조직도 물거품이고 인간관계도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진다. 총무원장의 권세도, 개혁가의 명성도 백 년 뒤에는 역사책의 몇 줄이 될 것이다.
《화엄경》의 거대한 세계관은 이 모든 존재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존재한다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보여준다.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가르침으로 그 정신을 압축해 말한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면 상대가 원수가 되고, 마음에 자비가 일어나면 어제의 원수도 오늘의 도반이 될 수 있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 안의 부처가 될 가능성을 보고 공경한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욕하는 사람,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서조차 불성을 보려 한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이 있다.
경전을 읽기는 쉽다. 경전을 외우기도 쉽다. 그러나 자신을 공격한 사람에게서 부처를 보는 것은 어렵다. 법당에서 자비를 말하기는 쉽지만 권력을 내려놓기는 어렵다. 무소유를 설하기는 쉽지만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놓기는 어렵다. 공을 말하기는 쉬워도 ‘내가 옳다’는 생각을 비우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것은 스님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목사와 신부에게도 해당하고, 정치인과 기업인과 언론인에게도 해당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한다. 종교가 커지고 조직이 커질수록 더욱 경계해야 한다. 신을 말하면서 권력을 탐하고, 부처를 말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진리를 말하면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종교는 어느 순간 가장 비종교적인 조직으로 변할 수 있다.
명진과 자승 두 스님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큰 가르침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다. 서로 다른 한국 불교를 꿈꾸었다. 한 사람은 개혁을 외쳤고 한 사람은 종단을 이끌었다. 역사가 어느 쪽의 공과 과를 더 크게 기록할지는 후대의 몫이다.
그러나 죽음은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세웠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부처가 왕궁을 버리고 길을 나선 것도 결국 이 네 글자 때문이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운명 앞에서 왕과 거지도, 총무원장과 평승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제 상상속에서 두 분 스님을 만날 수있다.
자승 스님이 먼저 건너간 피안의 어느 길목에 서 있다. 그리고 제주 바다를 떠난 명진 스님이 그 길을 따라온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처음에는 잠시 서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치열하게 다퉜던 두 사람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총무원이 없다. 봉은사도 없다. 종회의원도 없고 종권도 없다. 정부도 없고 정치도 없다. 제적도 없고 복권도 없다. 누가 이겼는지를 기록하는 기자도 없다.
그저 두 수행자만 남는다.
자승 스님이 먼저 합장할지도 모르겠다. “명진 스님, 왔습니까.” 명진 스님도 웃으며 합장할 것이다. “먼저 와 계셨군요.”
그것으로 끝이다.
그 순간 이승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갈등이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 두 사람은 비로소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도 한순간의 인연이었고, 그렇게 지키려 했던 자리도 잠시 빌려 앉았던 의자였음을 말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이 오늘따라 더욱 크게 들린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모두 함께 피안으로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자.
우리는 이 말을 죽음으로 가자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탐욕에서 자비로, 분노에서 용서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건너가자는 말로 읽는다. ‘나’에서 ‘우리’로, 권력에서 봉사로, 집착에서 자유로 건너가자는 말이다.
명진 스님도 갔다. 자승 스님도 갔다. 우리도 언젠가는 간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그렇게 움켜쥐고, 무엇을 그렇게 미워하며,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남겨야 하는가.
종교의 위대함은 거대한 절에 있지 않다. 높은 자리에 있지도 않고 수많은 신도에 있지도 않다. 인간의 탐욕을 줄이고 분노를 가라앉히며 어리석음을 깨뜨려 한 인간을 조금 더 자유롭고 자비롭게 만드는 데 종교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것이 부처가 2500년 전 우리에게 남긴 길이 아니겠는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음이 곧 비어 있음이고, 비어 있음 속에서 다시 생명이 피어난다.
이제 두 스님의 오랜 다툼도 놓아드리자. 누가 옳았는가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몫으로 남기고, 두 수행자의 영전에 우리 자신의 탐·진·치를 내려놓자.
그리고 두 분도 이제는 서로에게 합장하시기를. 명진 스님, 자승 스님. 이승에서 못다 한 화해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이루시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모두 함께 건너가자.
그리고 마침내,
미움도 원망도 권력도 없는
자유의 피안에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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