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남단 이투루프섬(일본명 에토로후섬)을 방문했다. 2000년 집권 이후 첫 방문이다. 러시아 국가원수의 쿠릴열도 방문은 201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의 쿠나시르섬(일본명 구나시리섬) 방문 이후 16년 만이자 두 번째다.
일본 주요 언론은 14일 푸틴 대통령이 왜 지금 쿠릴열도를 찾았는지를 분석하면서, 먼저 그가 26년 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부터 짚었다.
아사히신문은 실질적 최고 권력자인 푸틴 대통령이 그동안 쿠릴열도 방문을 미뤄온 이유가 일본에 영토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경제협력을 끌어내려는 데 있었다고 봤다.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대통령과 총리 재임 중 4차례 이곳을 찾았다. 반면 푸틴 대통령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27차례 정상회담을 거듭했고, 영토 문제를 포함한 평화조약 협상이 이어지는 동안 방문을 자제했다.
상황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달라졌다. 일본이 미국·유럽과 함께 대러 제재에 나서자 러시아는 일본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북방영토 문제를 포함한 평화조약 협상을 중단했다.
하카마다 시게키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는 요미우리신문에 푸틴 대통령이 그동안 방문을 삼간 것은 천연가스 등 자원을 사주는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얻어낼 것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지금의 일본 경제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아 경제협력의 이점을 기대할 상대로 더는 여기지 않는다며, 이번 방문에는 일본에 "영토 문제를 앞으로 의제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봤다.
다만 러시아가 일본과의 경제관계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사히에 따르면 아비루 다이스케 사사카와평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이번 방문을 정치적 관계 개선에는 제동을 걸되 경제관계는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이번 방문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접촉을 재개하던 시점에 이뤄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일본은 올해 2월 미국의 이란 공격 이후 에너지 조달처를 다변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 무렵부터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왔다. 5월에는 경제산업성과 외무성 간부들이 러시아를 찾아 경제발전부 관계자 등과 만나 사업 환경 개선을 요청했다. 7월에는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필리핀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관련 외교장관회의를 계기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5년 만에 접촉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의 움직임을 관계 개선에 나설 만큼 충분한 조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비루 연구원은 러시아가 일본에 요구한 것은 경제 제재 해제와 직항편 재개였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측이 제안한 차관급 회담에 일본이 응하지 않은 데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우크라이나 지원까지 확대하자, 러시아는 일본이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아비루 연구원은 이번 방문을 일본에 양국 관계를 다시 설정하자고 요구한 메시지로 읽었다.
고이즈미 유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교수는 "러시아라는 국가는 상대가 양보할 조짐을 보이면 오히려 압박 수위를 높여 추가 양보를 끌어내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방문에도 일본의 최근 조치만으로는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제재 완화 등 정책 전환을 요구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이 방문 하루 전 일본의 대러 제재를 비판하면서도 "일본을 포함한 모든 이웃 국가와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닛케이는 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일본이 먼저 추가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로 해석했다.
푸틴 대통령이 대일 압박을 강화한 배경에는 일본의 정책 전환을 끌어내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닛케이는 그가 이처럼 강경하게 나선 이면에 러시아가 처한 어려움이 있다고 봤다. 이달로 4년 반째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침공은 수감자와 북한군까지 투입하고도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드론 공격이 거세지고 휘발유 가격이 뛰면서 모스크바 시민들도 전쟁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전쟁 장기화의 부담은 경제지표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12일 발표된 러시아의 올해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했지만, 고금리와 투자 부진으로 경기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 군사비가 불어나 상반기 재정수지 적자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서방 제재가 길어지면서 인력난 등 전시경제의 왜곡도 표면화하고 있다.
제재 완화를 염두에 둔 대미 관계 개선도 기대만큼 진전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타진해 지난해 8월 알래스카에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지만, 후속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닛케이는 대미 관계 개선을 통해 제재가 완화될 것이라는 러시아의 기대도 낮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 장기화로 국내 여론이 흔들리는 가운데 러시아는 오는 9월 하원선거를 앞두고 있다. 요미우리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평화협상을 원하는 국민이 60%에 이르고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70%대에서 65%로 하락했다. 집권당 통합러시아의 지지율도 30% 수준에 머물러 있다.
효도 신지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연구간사는 아사히에 이번 방문의 첫 번째 목적이 러시아 국내에 메시지를 보내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하원선거를 앞두고 영토 문제에서 외국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부각하려 했다며, 불만이 쌓인 지방을 직접 챙기는 자세를 보여 애국심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다고 봤다. 푸틴 대통령은 쿠릴열도에서 "우리에겐 승자의 유전자가 있다"고 강조했고, 현지 학교에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여한 극동 출신 병사들에 관한 전시를 관람했다.
푸틴 대통령의 방문에 대해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13일 "일본 내 대러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중장기적인 관계 회복을 어렵게 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닛케이는 에너지 조달처 다변화를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재구축을 모색하면서도 일관된 대러 외교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 다카이치 외교정책의 틈을 러시아가 파고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제관계 전반을 고려한 대러 전략을 세우지 못하면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의 압력에 동시에 노출될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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