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공법불여대포(萬國公法不如大砲)'. 만국공법, 즉 국제법이 대포만 못하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중국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국제법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에 대한 회의를 여덟 글자에 담았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에서 일본에서 환수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를 처음 공개했다. 1910년 제작된 이 유묵은 세로 196.8cm, 가로 44.8cm다.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에 따른 동양의 평화와 국제 질서를 중시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에도,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정당한 전쟁 행위를 한 것이라며 만국공법에 따른 재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를 단순 살인죄로 기소해 사형을 구형했다. ‘만국공법불여대포’ 여덟 글자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유묵은 안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확인된다. 왼쪽 하단에는 안 의사 유묵의 상징인 손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 위에는 ‘경술삼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적었다. '경술년(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인 1910년 3월 26일을 불과 며칠을 앞두고 남긴 유묵인 것.
글씨는 행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해서와 초서를 혼용했다. 단숨에 쭉 써 내려간 듯 힘있는 필세가 돋보인다. 특히 본문의 ‘萬(만)’자를 초서로 쓴 것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이다. 안중근 의사만의 독자적인 글씨를 쓰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필획의 처리방식과 자형 구성, 운필의 속도감 등 서풍 전반에서 안 의사의 다른 유묵과 높은 유사성을 보이는 점을 비롯해 손도장도 일치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진본으로 판단했다.
유묵 뒷면의 묵서는 최초 소장자와 전승 경로를 보여준다. 묵서에는 1910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사형 집행에 이르는 경과, 최초 소장자, 유묵을 표구하고 보존한 이유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최초 소장자는 당시 뤼순감옥 형무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栗原貞吉·?~1941)다. 구리하라는 안 의사가 수감돼 있던 당시 인간적인 배려를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스스로를 ‘평문광생 뇌협일인(平門狂生 雷峽逸人)’이라고 밝힌 인물이 유묵을 넘겨받아 보존을 위해 표구한 뒤 간직했다.
유묵은 지난해 5월 국외재단이 현지 협력망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면서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가유산청의 행정적 지원과 국외재단의 면밀한 조사와 협상을 거쳐 같은 해 11월 국내 반입에 성공했다. 환수는 복권기금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광복절을 앞둔 뜻깊은 시점에 안중근 의사의 독립과 평화에 대한 열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국민께 공개하게 돼 의미가 크다”라며 “이번 공개를 통해 선열들의 광복을 위한 염원과 헌신을 되새기고 국민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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