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피터 파커·진 그레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들

  • 경험 회피와 구원자 콤플렉스, 애착 손상이 만든 두 생존 방식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세상을 구한 대가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를 사랑했던 MJ(젠데이아 콜먼)도, 가장 가까운 친구 네드(제이콥 배덜런)도 더는 피터를 기억하지 못한다. 스파이더맨은 뉴욕의 영웅으로 남았지만 가면 안의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없다. 피터는 자신이 선택한 희생을 홀로 감당하며 도시를 지킨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피터의 삶을 보여준다. 그는 범죄자를 잡고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하며 스파이더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겉으로는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는 친구도, 연인도, 자신의 과거를 함께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네드와 MJ의 삶을 SNS로 지켜볼 뿐 그들 앞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영화는 영웅으로서 성공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고립된 피터를 그린다.

피터는 외로울수록 더 많은 일을 한다. 도시를 지키고 주변 사람을 챙기며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아다닌다. 타인을 외면하지 못하는 윤리적 책임감은 여전히 그의 고귀한 자질이다. 동시에 그 책임은 자신의 상실을 직면하지 않게 해주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이를 억누르거나 피하려는 경향을 '경험 회피'라고 부른다. 회피는 당장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정을 처리하고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피터 역시 사람을 돌보는 일로 자신의 감정을 피한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피터의 삶에서는 구원자 콤플렉스와 맞닿은 부분도 발견된다. 타인을 돕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필요를 방치하는 행동 양식이다. 물론 피터는 실제로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능력이 있고, 그가 나서지 않으면 누군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의 구조 활동이 공허한 자기만족만은 아니다.

다만 반복적으로 희생하며 자신에게 구원자의 역할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내면은 불안정해질 수 있다. 피터에게는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없다. 자신의 본명을 불러주는 사람조차 사라졌다. 그런 삶에서 스파이더맨은 피터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정체성이 된다. 사람을 구하는 동안에는 자신도 구원받고 싶다는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영화 속 피터의 신체 변화는 이 심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힘은 이전보다 강해지지만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눈이 검게 변하고 분노와 공격성이 커지며, 손목에서는 기계 장치 없이도 거미줄이 나온다. 피터는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를 찾아가 변화한 능력 가운데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만 억제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배너는 어떤 진화가 좋고 나쁜지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피터는 자신의 감정에도 같은 태도를 보여왔다. 책임감과 다정함은 남기고 외로움과 분노,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억누르려 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자신을 나누고, 후자를 통제 장치로 눌러두려 한다.

하지만 감정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다. 억눌린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MJ에게 새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급격히 흔들리고, 신체적 변화까지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피터의 모습은 그동안 눌러온 감정이 더는 행동만으로 처리되지 않는 순간처럼 보인다.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는 그런 피터의 상처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건드린다.

진은 사람들의 정신과 몸을 넘나들며 목적을 이루려 한다. 특히 MJ의 몸을 장악한 채 스파이더맨과 옥상에서 마주한 장면은 피터의 상실을 정확히 겨냥한다. 진은 MJ의 얼굴과 목소리로 피터의 가면을 올리고 입을 맞춘다. MJ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 듯 반응하자 피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진 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 세이디 싱크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예고편
진 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 세이디 싱크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예고편]

피터에게 가장 소중했던 친밀감을 공격 수단으로 바꾼 진. 그에게 타인의 마음은 이해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들어가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는 진이 왜 친밀감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됐는지 뒤늦게 보여준다.

진·세라 자매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는다. 자신들의 능력 때문에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사람에게 거부당한다. 진에게 남은 보호자는 세라뿐이었지만 세라마저 대미지 컨트롤에 끌려가 실험 대상이 된다. 진은 언니를 구하려 하지만, 끝내 너무 늦게 도착한다.

피터와 진은 모두 이른 나이에 보호자를 잃었다. 하지만 상실 이후 두 사람이 택한 생존 방식은 정반대다.

피터는 보호자를 잃은 뒤 타인의 보호자가 됐다. 자신이 더 책임지고 더 빨리 움직인다면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통제할 수 없었던 사건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며 모두를 지키려 한다.

진은 보호자를 잃은 뒤 누구의 보호도 믿지 않게 됐다. 관계는 언젠가 끊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빼앗기고, 힘을 가진 기관은 자신을 보호하기보다 이용한다고 학습했다. 다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상대의 마음에 들어가 통제해야 한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피터의 마음에는 "내가 더 책임지면 누구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진의 마음에는 "누구도 믿지 않아야 다시 빼앗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한 사람은 상실을 책임으로 바꿨고, 다른 사람은 상실을 증오와 경계로 바꿨다. 피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지웠고, 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밀어냈다. 피터는 관계 속에서 과도한 책임을 떠맡았고, 진은 관계가 줄 수 있는 상처를 막기 위해 타인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사람과 너무 일찍 어린 시절을 박탈당한 사람의 만남이다.

피터가 MJ에게 자신의 과거와 감정을 털어놓는 장면은 기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그는 늘 타인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지우고, 자신의 욕구를 말하기보다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MJ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MJ를 사랑하는지 고백한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자신이 오해했던 진을 다시 구하러 가는 선택도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또다시 자신의 고통을 미뤄두고 구원자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MJ에게 마음을 거절당한 직후 새로운 구조 대상을 찾아 나서는 행동만 놓고 보면, 상처를 일로 덮는 익숙한 방식이 반복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을 일방적으로 교정하거나 제압하기 위해 다가가는 게 아니다. 세라의 존재와 대미지 컨트롤의 거짓말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진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부터 인정한다. 진의 위험한 행동을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행동 뒤에 있는 상실을 보려 한다.

결정적인 순간 피터는 진에게 자신의 기억을 열어준다. 진은 피터가 경험한 죽음과 상실,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야 했던 선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들여다본다. 피터의 기억 속 메이 숙모와 피터의 목소리는 분노에 잠긴 진에게 닿는다.

이 장면에서 진의 텔레파시 능력은 처음으로 다른 의미를 얻는다. 앞서 진은 상대의 동의 없이 정신에 들어가 몸을 빼앗고 조종했다. 피터는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열어 보인다. 같은 능력이 침입과 지배의 수단에서 이해와 연결의 통로로 바뀐다.

진은 피터의 기억을 통해 그가 고통을 모르는 순진한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세상에서 잊혔고, 자신이 선택한 책임을 혼자 감당해왔다. 그런데도 타인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피터의 다정함은 고통을 몰라서 가능한 태도가 아니라, 고통을 알고도 반복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피터는 진의 분노 안에서 세라를 잃은 아이를 발견한다. 그동안 진을 통제 불가능한 위협으로만 봤다면, 이제는 왜 그가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는지를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해서 진의 폭력적인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진 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 세이디 싱크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예고편
진 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 세이디 싱크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예고편]

진에게 피터는 자신을 막으려는 또 한 명의 적이었다. 피터에게 진은 도시를 위협하는 또 한 명의 위험 인물이었다. 기억이 열리자 둘은 서로를 역할이 아닌 인간으로 마주한다.

MJ와 네드는 피터를 기억하지 못한다. 도시는 스파이더맨의 활약은 기억하지만 가면 아래 한 사람이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피터가 사랑받았고, 상실했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는 역사는 오직 그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진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피터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다.

피터는 진을 구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정작 진은 세상에서 지워진 피터의 역사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된다. 피터는 일방적인 구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 역시 이해받고 돌려받는 경험을 한다.

영화가 들려주는 거미의 생애 주기는 이러한 피터의 변화를 상징한다. 영화 속 강의에서는 거미가 세 번의 생애 단계를 거치며,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동안 위협에 취약해진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 시기를 견딘 거미에게는 일종의 재탄생이 찾아온다.

피터 역시 이전의 삶에서는 이미 빠져나왔지만 새로운 삶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MJ와 네드에게 기억되던 피터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가면만 쓴 채 영원히 홀로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는 과거의 껍질을 벗었지만 새로운 외골격은 아직 굳지 않은 상태다. 감정적으로 가장 연약한 시기에 MJ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었고, 가장 두려워했던 거절을 경험한다.

하지만 껍질을 벗은 직후의 취약함은 성장의 실패가 아니다.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고 새로운 방식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전환기의 특징이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피터의 첫 번째 삶이 관계 속에서 사랑받던 소년의 삶이었다면, 두 번째 삶은 기억에서 지워진 뒤 구원자의 역할만으로 자신을 유지한 삶이다. 이제 시작될 세 번째 삶은 사람을 구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타인을 돌보면서 자신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진에게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준비도 없이 어린 시절을 빼앗긴 그는 누구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피터의 기억을 읽으며 상처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타인을 지배하거나 밀어내는 쪽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피터는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과거의 삶을 벗어던진 사람이다. 진은 세상이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껍질을 강제로 벗겨버린 사람이다.

'브랜드 뉴 데이'는 상처가 모두 아문 날이 아니다. 이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새로운 자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날이다. 사람을 구하며 자신을 피했던 피터와, 사람을 밀어내며 자신을 지켰던 진이 처음으로 상처를 숨기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발견된 날이다.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포스터
[사진=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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