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탐사기획] 승소하고도 못 받는 100억원…항소심으로 이어진 공방

  • "전대차계약서 확인으로 충분"…법원, 협회 책임 불인정 

  • 전차인 임대인에 직접 권리 주장 불가…법·제도적 한계

[편집자주]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아주경제 탐사보도팀 '발품'은 20~30대 기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목소리를 기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제·산업·정치·사회·부동산·문화를 가리지 않고, 삶과 맞닿은 모든 현장을 추적합니다. 문제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끝까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발품'은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끝까지 전하기 위해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요하게 묻겠습니다. 독자가 미처 닿지 못한 곳까지 대신 걸어가겠습니다.
건설기술인회관 별관 내부 복도 사진방효정 기자
건설기술인회관 별관 내부 복도 [사진=박승호 기자]

한국건설기술인협회(협회)의 이름을 믿고 오피스텔 전대차 계약을 맺은 세입자들이 100억원대의 보증금을 떼일 위기에 처했다. 건물 전체를 임차한 임대업체 소버린스테이트가 보증금을 무리하게 전기차 충전 사업에 투입했다가 법인 부채만 300억원대로 불려놓았기 때문이다. 임대료 연체로 계약이 해지되면서 피해는 오롯이 세입자들에게 돌아갔지만, 1심 법원은 협회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입자들은 "공공기관 성격의 협회 간판에 속았다"며 항소를 제기하게 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소버린 입주민 25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버린 측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소버린스테이트 법인에 대한 청구는 모두 인용했고, 최씨와 유씨에 대해서도 지연손해금 이율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판결만 놓고 보면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실제 보증금을 회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소버린 측에 변제 자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건물주이자 1차 임대인인 한국건설기술인협회를 상대로도 법적 책임을 물었다. 협회가 소버린에 전세권 설정 등기까지 마쳐주었고, 각 호실에 전차인들이 실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관리·감독을 방치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소버린의 자금 난항 및 차임 연체 정황 등 위험 신호를 충분히 인지하거나 막을 수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방치해, 세입자들이 소버린의 자금 사정을 정상으로 오인하도록 방조했다는 게 피해자 측 주장이다. 
 
아주경제 탐사보도팀은 지난달 16일 '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의 일부 피해 입주민들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박승호 기자]
아주경제 탐사보도팀은 지난달 16일 '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의 일부 피해 입주민들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박승호 기자]
 
피해자들은 협회의 직접적인 배상 책임이 부정될 경우를 대비해, 협회가 소버린에 돌려줘야 할 전세보증금 20억원을 세입자들에게 지급하라는 예비적 청구도 함께 냈다. 소버린이 협회로부터 받아야 할 보증금 반환 채권을 세입자들이 대신 행사(채권자대위권)해, 피해액 비율에 맞춰 나누어 받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임대차계약상 '전차보증금이 임대차보증금의 80%를 넘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이는 협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항일 뿐 협회에 전차보증금 총액을 관리·감독할 의무까지 지우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협회로서는 소버린이 제출한 자료만 확인하면 충분하고 그 내용이 실제 매물 현황과 맞는지까지 조사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협회가 소버린 측의 사기 행각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피해자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회가 전대차 계약 현황 자료를 요구해 받아왔지만, 소버린이 위조 계약서를 제출해 실제 보증금 규모를 파악하기 불가능했다는 이유다. 계약서상 중개업자 인장 누락이나 입주자 개인정보 삭제 등의 정황만으로 협회가 문서 위조까지 예상하기는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대신 전세사기 매물을 중개한 공인중개사들의 과실 수준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차등 적용했다. 중개 과정에서 전대차 계약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지한 중개사들에게는 20%의 배상 책임을 물렸다. 반면 전대차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경우나 협회와의 계약서를 보여줬다고 인정할 자료가 없는 중개사에게는 30~40% 비율로 물었다. 

이들 중개사들과 공제·보험 계약을 맺은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서울보증보험의 책임 범위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이들 기관에 직접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대신, 개별 중개사들이 가입한 보증 한도 내에서 해당 중개사가 부담하는 손해배상채무만큼을 대신 지급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협회·보증보험사의 지급 의무가 소버린의 전차보증금 반환 채무, 소버린 관계자 및 중개사들의 손해배상 채무와 공동으로 묶여 있는 연대 관계(부진정연대채무)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은 전체 손해액 범위 내에서 소버린이나 중개사뿐만 아니라 공인중개사협회·보증보험사 등에도 배상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국건설기술인협회 본관 [사진=방효정 기자]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국건설기술인협회 본관 [사진=방효정 기자]
 
아주경제 탐사보도팀은 이번 판결과 관련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 기관들에도 향후 대응 방침과 조치 사항을 물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배상 책임과 향후 대응 방침에 대해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며, 항소심 결과가 확정되면 법원 판결에 따라 최종 손해배상 규모가 정해질 것"이라며 "판결 확정 시 청구인들이 공제금 지급청구 서류를 제출하면 공제금을 지급받을 수 있고, 상고 여부 등 향후 대응 역시 항소심 결과에 따라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책임이 인정된 중개사들에 대한 처분 여부에 대해서는 "정관에 따라 자격 및 개설등록이 취소된 회원은 협회에 대한 모든 권리가 상실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 "중개인 관련 소송은 수없이 발생해 해당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관계자의 발언이 보도된 바 있으나, 현재는 사안을 파악하고 항소심 절차에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서울보증보험(SGI)은 "개별 계약 조건이 다르고 금융거래정보에 해당해 현 시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면서도 "보험금 청구가 접수되는 경우에는 보험사고 발생 여부 및 사실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하고, 관련 법령과 내부 절차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강남구청 부동산과에도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된 공인중개사들에 대한 행정처분 내역에 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구청 측은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강남구청 부동산과는 서면으로 "당사자 간 민사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과 관련된 정보"라며 "진행 중인 재판에 관련된 정보를 공개할 경우 재판의 심리나 결과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법인·단체의 경영·영업상 비밀에 해당해 공개 시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점도 비공개 사유로 들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2보증금의 회수 조문 제2항의 우선변제권은 대항요건과 확정일자를 갖춘 임차인에게만 인정된다 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2(보증금의 회수) 조문. 제2항의 우선변제권은 대항요건과 확정일자를 갖춘 '임차인'에게만 인정된다. [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대차 계약의 법적·제도적 한계도 문제로 지적된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전차인은 원상태의 건물 소유주에게 직접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갖추더라도 우선변제권은 전대인의 권리 한도 내에서만 작동하며, 임차권등기명령 역시 신청 자격이 없다. 전세사기피해자특별법 또한 확정일자·임차권등기·전세권 설정 등 임대인과의 직접 계약을 전제로 한 요건을 내걸고 있어, 전차인들은 피해 구제 대상에서 소외되기 일쑤다. 결과적으로 경매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해도 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을 제도적 안전망은 전무한 실정이다.

법원이 소버린의 책임을 인정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러나 판결문이 확인해 준 것은 승소가 곧 피해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대차라는 제도적 틈새를 파고든 위협 앞에서 피해자들은 법원과 현행법 어디에서도 실질적인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다. 100억원대 피해를 키운 구조적 공백은 사건이 장기화하는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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