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저녁 광화문광장.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의 맑은 목소리로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무대에 선 이들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에디오피아 강뉴부대 참전용사들의 손자·손녀 세대였다.
공연의 마지막, 대한민국과 6·25전쟁 참전 22개국을 상징하는 23개의 빛기둥이 광장을 환하게 밝혔다. 76년 전 전장에서 맺어진 인연은 음악이 되고, 빛이 되고, 미래세대의 우정으로 다시 살아났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감사의 정원'이 단순한 추모공간을 넘어 세계와 대한민국을 잇는 새로운 메모리얼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워싱턴은 이름, 파리는 불꽃… 서울은 '23개의 빛'
세계적인 메모리얼 공간은 과거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민들이 반복해서 찾고 참여하면서 기억을 현재로 이어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은 전사·실종 장병 5만8318명의 이름을 검은 화강암 벽에 새겨 희생을 기억한다. 방문객들은 이름을 따라 걸으며 거울처럼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함께 마주한다.
프랑스 파리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는 매일 저녁 '기억의 불꽃'을 다시 밝히는 의식을 이어간다. 100년 넘게 계속된 이 의식은 관광명소를 국가적 추모공간으로 만드는 상징이 됐다.
서울은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대한민국과 참전 22개국을 상징하는 높이 6.25m의 석재기둥 23개가 광장을 둘러서고, 밤이면 '감사의 빛 23'이 하나의 빛으로 연결된다.
워싱턴이 이름으로 기억하고, 파리가 불꽃으로 추모한다면, 서울은 23개의 빛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함께 지켜준 세계에 감사를 전하는 것이다.
추모를 넘어 시민이 참여하는 '살아있는 기억'
감사의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기억이 전시물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6월 열린 서울시 6·25전쟁 기념식에서는 참전 22개국 국기가 광장에 함께 게양됐고 '감사의 빛 23'이 점등됐다. 보훈단체와 청년,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첫 공식행사였다.
6·25 기념주간에는 시민들이 광화문과 정동길을 잇는 6.25㎞ 코스를 달렸고, 어린이와 청년들은 참전국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야외도서관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책과 영화가 시민들을 만났다.
대한민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가 열린 날에는 시민들과 주한 남아공대사가 광장에서 함께 응원하며 76년 전 전우의 인연을 스포츠로 이어갔다.
기념식과 공연, 달리기와 스포츠 응원까지 형식은 달랐지만 메시지는 같았다. 자유와 번영은 대한민국만의 힘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희생과 연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프리덤홀 두 달여 만에 10만명… 메모리얼의 새 모델
지하 전시공간인 '프리덤홀' 역시 빠르게 시민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5월 12일 개장한 프리덤홀은 두 달여 만에 누적 방문객 10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6월 21일 6만2000여 명을 기록한 이후 한 달 만에 3만명 이상이 추가로 찾았다.
미디어아트로 구현한 전시에서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대한민국의 성장 과정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세계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모리얼 플랫폼으로"
보훈·문화계에서는 감사의 정원이 과거의 희생을 추모하는 공간을 넘어 참전국과 대한민국의 우호를 미래세대로 이어가는 새로운 메모리얼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워싱턴과 파리가 각각 '이름'과 '불꽃'이라는 상징으로 세계적인 메모리얼 랜드마크가 됐듯, 서울 역시 '23개의 빛'이라는 고유한 상징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감사의 정원은 전쟁의 희생을 기억하는 공간을 넘어 시민과 미래세대가 참전국과의 우호와 연대의 역사를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공간"이라며 "기념행사와 전시, 문화예술, 국제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대표 메모리얼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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