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휩쓰는 미술관 건립 경쟁
지금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하듯 미술관 건립에 나서고 있다. 충남도와 경북도 같은 광역자치단체는 물론, 충주, 제천, 공주, 당진, 서산, 창원, 경주, 춘천, 원주, 광명, 화성, 구리, 여수, 전주에 이르기까지 그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미술관이 전국 각지에서 계획되고 추진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총 243개의 광역 및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 중인 등록된 공립미술관이 78개관이다. 이미 평균 약 3분의 1 지역이 공립미술관을 설립 운영 중안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머지않아 그 수를 크게 늘릴 것으로 보인다.1991년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정과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시작된 공립 미술관·박물관 건립 붐은 1990년대 중후반 높은 유지·관리비와 재정 부담으로 설립 붐이 조금씩 식기 시작하더니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국가 및 지자체의 예산 축소로 건립 열기가 급격하게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이런 분위기를 깬 것은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과 이후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이 한국 미술관 정책의 궤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전례 없는 규모의 문화재·미술품 기증은 단순한 문화재 유치 경쟁을 넘어, 미술관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격상시켰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장은 기증관 유치를 정치적 성과로 포장하며, 경쟁에 뛰어들었고, 이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지방의 공립미술관에 기증이 완료된 사실을 무시하고 박물관학적인 검토도 없이 섣부른 문화부의 “이건희기증관 서울 건립” 결정은 지역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후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보상 심리로 전환해 자체 미술관 건립 동력으로 활용했다. 이후 미술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을 넘어 지역 균형 발전의 상징 지표로 재정의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요한 구조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실제로 컬렉션을 유치했느냐와 상관없이, 전국의 지자체는 “미술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내면화하게 되었고, 이는 “왜?”라는 정체성과 “무엇을”이란 콘텐츠에 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목표의 공허함으로 이어졌다. 이는 애초에 미술사에 기초한 학예적 구상이나 뚜렷한 정체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유치 실패에 대한 정치적 보상 심리에서 비롯된 건립 계획이 많았던 까닭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구체적 정체성을 갖추기 어려운 구조가 내재 되어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건희 컬렉션은 단순한 작품 기증을 넘어, 한국 미술관 정책의 방향을 정치적·구조적 차원에서 뒤흔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설립을 위한 정당성의 빈약함은 지금까지도 각 지역미술관의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체성 문제를 짓누르고 있다. 즉 개성 없는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개성없는 작품이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미술관으로서 존재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가 공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건립하려면 문화체육관광부의 꽤 엄격한 ‘설립타당성 사전평가’를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공립 박물관·미술관 건립 예산이 국고 보조에서 지자체가 지방비 100%를 부담하는 균형발전특별회계 사업으로 전면 전환되면서, 예산권은 이전되었으나 중앙정부 규제는 여전하다는 지적 때문에 광역지방자치단체 자체 사무로 이관되었고 이후 이를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지방의 미술관이 단순한 ‘보상 심리’나 ‘균형 발전의 상징’이 아니라, 진정한 학문적, 학예적 비전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직 그 지역에만 있는 “유일한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품은 성소”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지자체치고 미술관 하나쯤 갖추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로, 미술관은 이제 지역 문화행정의 필수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숫자의 증가가 곧 미술관 생태계의 성숙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양적 팽창을 자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켜켜이 쌓인 구조적 결함을 직시하고 시정하는 일이다.
허울뿐인 성채, 한국의 미술관
중앙정부의 빗장이 풀린 만큼 지자체가 지역 특색에 맞춘 문화 공간을 주도적으로 건립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예산 편성부터 심사까지 손에 쥔 지방정부가 자칫 외형적 성과주의에 함몰될 경우, 건물만 있는 미술관, 미술관이 아닌 전시관으로 전락할 위험이 상당하다.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것은 그 준비와 실행 과정이 모두 공허한 구호와 말의 성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선 설립 취지부터 공허하다. 지방미술관들의 설립 목표를 보면 하나같이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차별화된 미술관’을 표방한다. 문제는 이 ‘차별화’의 다짐 자체가 전국 거의 모든 지자체의 미술관에서 판박이처럼 반복된다는 데 있다. 구체적 정체성 없이 ‘특별’해지자는 선언만 앞세우다 보니, 실제 운영 단계에 이르면 결국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반적인 메뉴얼을 답습한다.
또 “지역작가의 발굴과 육성”이라는 미술관과는 동떨어진 역할을 목표로 하면서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이라는 미술관 고유 기능과 성격이 다른 “예술 진흥·창작지원” 사업을 전개한다. 정치적 명분에 따라 이를 핵심 역할로 내세울 경우, 미술관이 지역 작가의 전속 갤러리처럼 되어 컬렉션의 전문성과 학예적 기획력이 약화 될 위험이 있으며, 나아가 소장품 수집마저 학예적, 미술사적 전략이 아닌 작가 지원 논리에 좌우되어 미술관 본연의 목적과 충돌하게 된다.
목표가 추상적이다 보니 그것을 뒷받침해야 할 작품수집정책 역시 구체적이지 못하다. ‘지역 미술사 정립과 지역작가 발굴’,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 소장’ 같은 포괄적 문구에 머무는 수집정책은, 예산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현실과 맞물려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무난한 작품, 출신지가 유일한 기준인 지역작가 작품 위주로 수집되기 마련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지역주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미술관의 시야를 좁힌다는 점이다. ‘지역 작가’, ‘향토성’을 앞세우는 수집·전시 원칙은 예술적 성취보다 출신지와 연고를 기준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으며, 이는 미술관의 학예적 전문성이 행정적·정치적 논리에 종속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미술관들은 처음부터 세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토대 위에 개방적 안목으로 걸작을 얹을 줄 알았기에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었다. 행정구역이라는 좁은 틀에 자신을 가두는 순간, 질 높은 컬렉션을 확보할 기회는 저절로 걷어차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거버넌스(Governance)에 관한 고민조차 없이 ‘출장소형 미술관’ 즉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예산을 집행하고 인력을 관리하는 전형적인 ‘지방자치단체 직영 사업소’ 체제다. 이렇게 자치단체가 직영하는 미술관은 지방비를 통한 안정적 운영과 공익적 기능 수행의 강점이 있으나, 순환보직에 따른 전문성 저하, 전문성없는 행정공무원의 관장 부임 또는 지방임기제 공무원으로 관장을 공모하는 개방형 직위를 통해 외부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부금 모집 제한과 입장료등 수입의 일반회계 귀속등 재정적 자생력 부족이라는 한계가 있다. 특히, 까다로운 지방계약법 적용과 수입의 일반회계 귀속은 전문적인 전시 기획과 유연한 재정 운용을 어렵게 하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대구는 미술관이 산하기관인 (재)대구문화예술진흥원으로 편입되면서 관장의 직급 자체가 낮아져, 결과적으로 역량 있는 관장 영입이 어려워졌고, 이후 지자체장과의 사적 인연을 둘러싼 인사 논란까지 일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 전문임기제 임명을 둘러싸고는 공모 절차가 개시되기 전에 이미 특정 인사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잇따랐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검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사회나 학예위원회 같은 완충 장치 없이 미술관이 지자체 행정라인의 직접 통제 아래 놓여 있는 한, 이런 파행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반면교사, 버블시대 일본의 미술관 붐과 몰락
오늘날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는 읍, 면을 제외하면 47개의 도도부현과 792개 시, 23개의 특별구 등 총 862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공립미술관은 591개 관에 달해 평균 68%의 지자체가 미술관을 설립 운영 중이다. 이는 언뜻 성공적인 문화인프라 확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당시 다수의 미술관이 소장품이란 콘텐츠보다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를 먼저 세웠고, 전문가들은 건물은 훌륭하지만, 미술관의 생명이라 할 소장품이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미술관은 자동차 없이는 갈 수 없거나 대중교통의 경우 여러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땅값 싼 장소에 운영은 고려하지 않은 채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 대형 건물부터 지었다.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도 진입로조차 없는 과천에 미술관을 세운 것도 일본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거품경제가 꺼지자 이런 부실한 토대는 곧바로 민낯을 드러냈다. 거품경제기 전부터 이미 지적되어 온 문제이지만, 미술관·박물관·공민관 등을 지자체들이 경쟁하듯 건설한, 이른바 ‘속빈 상자(箱物)’ 행정에 관한 의문과 비판이 대두했고, 이는 결국 ‘속 빈 상자 불용론’으로 이어졌다. 많은 미술관이 정작 거품에 의한 호황의 여파를 함께 뒤집어쓴 셈이지만, 호황이란 분위기에 편승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사자인 미술관도 당시 착실하게 소장품을 확충하는 활동이나 내용을 충실하게 보완하는 일에 집중했는지에 반성할 점이 없지 않았다.
‘속 빈 상자’라는 자조적 비판이 일본 전역으로 휩쓸었고, 덩달아 문을 열었던 사립미술관들도 잇따라 문을 닫았으며, 지자체 미술관들은 운영예산과 구입예산 삭감이라는 고통을 겪었다. 오사카부(大阪府)와 오사카시(大阪市)는 거품경제 붕괴 후 장기 저성장으로 세수가 정체되면서 지방채 잔액과 실질공채비율이 전국 최악 수준에 도달하는 등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졌다. 따라서 약 7900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을 자랑했던 오사카부립현대미술센터(大阪府立現代美術センター)는 부 재정 악화와 새로운 미술관 건립 동결 방침과 관람객 수가 줄고 타 시설과의 기능 중복을 이유로 2008년 폐관 대상으로 분류되어 결국 2012년 폐관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공립미술관 가운데 2000년 이전에 개관한 곳은 전체의 72.9%에 달한다. 따라서 이제는 시설 노후화와 이를 개선(Renewal)해야 하는 새로운 부담이 지자체 재정을 짓누르고 있다. 일본박물관협회에 따르면 공립미술관의 83.0%가 노후화해서 개보수가 시급하지만, 정작 예산을 세워 보수공사에 착수하거나 계획 중인 곳은 10%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이런 재정난은 필연적으로 인력난으로 이어졌다. 2001년 오사카역사박물관(大阪歴史博物館)으로 기능이 이전되면서 폐관된 오사카시립박물관의 경우 민간위탁과 비슷한 지정관리자 제도를 도입했지만 짧은 계약 기간 탓에 장기적인 사업 계획이나 인재 확보가 어려웠고, 인건비 억제로 학예사는 줄고 비정규직은 늘었으며, 그 결과 기획력 저하와 관람객 감소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이렇게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2025년에는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의 상설전 입장료를 620엔에서 1000엔으로, 과거 30년 전과 비교하면 약 3배, 외국인에게는 입장료를 더 부가하는 등, 재정난은 결국 시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물론 일본의 모든 미술관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버블시대의 실책을 반면교사 삼아 2000년 이후 개관한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金沢21世紀美術館,2004), 아오모리현립미술관(青森県立美術館, 2006) 처럼 ‘빈 상자’라는 오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지방미술관이 나왔다.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또?
지금 한국은 문화부의 사전평가나 심사가 지방으로 이양되면서 일본이 거품경제기에 저질렀던 실수, 지금까지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저지른, 소장품(Content) 없이 건물부터 세우는 방식을 다시 답습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는 신규 건립 경쟁까지 더해지면, 한국은 일본이 겪은 재정난·인력난·노후화의 3중고를 한꺼번에, 그것도 훨씬 짧은 시간에 맞게 될 것이다. 일본은 그나마 고도성장기 두터운 세수를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여력이 있었지만, 저성장과 인구 감소, 지방 소멸이 이미 가시화된 한국의 지방재정은 이를 감당할 힘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정부의 빗장이 풀린 만큼 지자체가 지역 특색에 맞춘 문화 공간을 주도적으로 건립할 길은 열렸다. 그러나 예산 편성부터 심사까지 손에 쥔 지방정부가 자칫 외형적 성과주의에 함몰될 경우, 과거 해외 각국이 겪었던 텅 빈 ‘빈 상자’를 만드는 일을 답습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멋진 건물의 웅장함에만 집착하다 재정 파탄과 콘텐츠 부재라는 늪에 빠진 세계 각지의 실패 사례는 지금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대형 리조트와 연계해 화려하게 문을 열었던 라스베이거스(Las Vegas)의 구겐하임 에르미타주 미술관(Guggenheim Hermitage Museum)은 카지노 중심의 도시 생태계와 겉돌며 관람객의 외면을 받았고, 결국 개관 7년 만에 전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런 모든 사례가 가리키는 결론은 단 하나다. “일단 건물을 지어 놓으면 알맹이는 어떻게든 채워질 것”이라는 안일한 하드웨어 중심적 사고와 “자기 먹을 것은 들고 태어난다.”는 속담을 믿은, 알맹이 없는 하드웨어 중심의 낙관론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다. 이런 경우 예외 없이 재정 재앙과 문화적 공동화를 낳았다.
지자체에 넘어온 사전평가 권한이 단체장의 치적 쌓기용 ‘콘크리트 과시욕’으로 변질되는 순간, 세금으로 지은 미술관은 지역의 흉물이자 없느니만 못한 재정 절벽의 주범이 될 것이다. 이제라도 문화부는 철저한 표준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감시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며, 지자체는 건물이 아닌 ‘콘텐츠와 지속 가능한 운영 역량’이 담보되지 않는 미술관은 한 삽도 뜨지 않겠다는 냉철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때이다.
지역통합, 지역소멸의 시대, 지방미술관의 갈 길
이와 함께 여전히 미술관으로 유지하는 기관은, 등록 이후에도 수집의 지속성이 담보되도록, 연간 수집예산을 운영예산의 일정 비율 이상으로 못 박거나, 정기적으로 매년 재등록 심사를 통해 수집 정책의 이행 여부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지방자치단체도 큰 부담없이 전시관을 통해 지역주민의 문화 향수와 지역 작가 및 기타 국내외적으로 수준 높은 전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건립 이전에 장기 운영 재원과 전문 인력 확보 계획을 의무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미술관은 일반 건축물과 달리 시설 유지비(Hard Cost)도 많이 들지만, 인건비와 기획 사업비(Soft Cost) 비중이 2~3배 이상 큰 대표적인 ‘재정 소비형 문화시설’이다. 따라서 연 면적 1500평, 건축비가 300억 원인 미술관의 경우, 순수 시설 유지비는 건축비의 1~2%인 3억~6억에 불과하지만, 미술관의 핵심인 전시기획, 작품구입, 학예사 및 전문인력과 일반행정요원의 인건비를 포함하는 운영비(OMC)는 건축비의 10% 이상인 연 30억~40억 원이 매년 투입되어야 정상적인 미술관 기능이 가능하다. 따라서 공립미술관 건립 시 초기 건축비보다는 “매년 지자체 또는 차 상급 지자체, 국비에서 수십억 원의 운영비를 계속해서 지원할 재정적 여력이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재정난은 필연적으로 학예 인력의 비정규직화와 전문성 저하로 이어진다. 건립 예산만 확보한 채 운영비와 인건비에 대한 중장기 계획 없이 첫 삽을 뜨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인근 지자체 간 미술관의 목적과 작품수집정책등의 조율을 거쳐 기능이 중복되는 것을 사전에 조정하는 광역 단위의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 인접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이 유사 성격의 미술관을 각자 건립할 경우, 한정된 수집대상 작품과 관람객, 예산을 서로 잠식하는 소모적인 경쟁 때문에 제로섬 게임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운영 중인 광역단체 미술관은 거점미술관으로 소장품 수집과 연구, 보존이라는 학예, 교육 기능을 집중적으로 담당하고, 산하 기초자치단체 미술관은 소장품 수집보다 전시와 교육, 지역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전시관’을 설립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며 미래에 대비하는 전략이 될 것이다.
미술관 하나가 지방의 미술 관련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기능별로 분화해, 한쪽은 상설 소장품 전시와 연구를, 다른 한쪽은 신진 작가 발굴과 실험적 기획전을 맡도록 하고, 창작지원센터형 시설을 별도로 두어 작가 육성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의 도청소재지가 있는 도시는 광역단체인 도와 시와 공동으로, 예를 들면 ‘충남홍성미술관’을 충남도와 홍성군이 같이 설립과 운영예산을 분담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특히 지역통합이 논의되는 지금 단계에서 새로운 미술관 건립 심의를 강화해 기능 중복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특히 광역의 통합 마스터플랜을 선제적으로 수립해 광역 단위의 미술관 배치와 역할을 미리 연구하고 설계해, 중복 시설에는 일몰조항을 부여해 통합 이후 재조정이나 통폐합을 전제로 운영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자치단체 산하의 일반적인 연구소나 대학 산학협력단 또는 민간의 사설연구소가 아니라 박물관학을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십수 년 이상 근무경력이 있는 학예연구직이나 전문미술관 연구자로 구성된 “문화 기획 및 박물관 컨설팅펌(Firm)”을 선정 “전권 위임형 사업주 대리인(Owner’s Representative, Development Manager)”으로 선임하는 것이 최선이다.
건물만 있고 사람도, 작품도 없는 미술관
한국 미술관의 치명적 약점은 또 있다. 전문학예인력의 부족이다. 일본이 기하급수적으로 미술관이 늘면서 그랬듯이 자격증 갖춘 학예직들은 많지만 정작 미술관의 건립과 건축, 개관프로그램과 그 이후 규모 있는 국내외 전시를 꾸려나갈 수 있는 중견 이상의 학예직은 태 부족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은 인력 공백을 메꾸고자 큐레이터들을 해외 연수·인턴십·장기 재직을 통해 서서히 그 확보해 나왔다. 하지만 한국은 그 축적의 시간이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한국의 큐레이터 특히 학예사자격제도가 도입된 2000년 이후 약 1만3000명이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숫자도 많고. 일하겠다는 사람도 많지만, 정착 일을 시킬만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미술관의 학예업무를 맡아 일할 중견 학예 인력의 부재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한국의 미술관은 지난 삼십여 년간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의 속도를 감당할 만한 중견 학예 인력은 여전히 충분히 자라나지 못했다. 이는 사람을 키워낼 시스템이 애초에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랄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우선 고용구조가 경험의 축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립미술관의 학예직은 계약직이나 기간제로 채용되는 경우가 많아, 전시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해 볼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공무원 신분인 경우에도 순환보직 탓에, 몇 년마다 미술관에 있던 이가 갑자기 박물관으로, 부서나 기관을 옮겨야 해서 전문성이 끊긴다. 한 기관, 한 부서에서 십 년 이상 머물며 소장품 정책과 작가와 미술계 그리고 국제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쌓아가는 경험을 축적하기에는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정부가 미술관을 건립할 경우, 미술관의 기획을 시작으로 건축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수장고 설계, 전시 동선, 항온항습 시스템 같은 물리적 인프라를 이해하는 경험, 개관을 앞두고 소장품 정책, 브랜드 아이덴티티, 개관특별전 기획을 총괄해 본 경험, 해외 미술관, 비엔날레 등과 같은 국제적인 전시운영 능력과 작품의 대여, 공동기획, 순회전을 협상해 본 경험과 그 네트워크와 실무 감각을 가진 이를 필요로 하는데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국내에 10여 명도 채 안 된다는 점이 문제다. 게다가 미술관 건립은 미술과 건축과 시공이라는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부분을 다뤄야 해 외국도 중대형 프로젝트의 경우 전문 “문화 기획 및 박물관 컨설팅 펌(Firm)”에 맡겨 해결한다.
위임의 문화가 빈약한 것도 원인이다. 개관전이나 국제교류전같은 대형 전시는 관장이 직접 또는 외부 커미셔너를 두어 총괄하고, 중간 연차 학예직은 세부 실행, 실무에 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산을 짜고 해외 기관과 대여를 협상하며 전시 전체를 실현해 보는 경험은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는 시간과 사람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은 서둘러야 해서 생기는 일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와 훈련의 기반이 약한 것도 사람이 없는 큰 이유다. 해외 미술관에서 일이 년간 인턴십이나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소장품 관리와 전시기획, 관장급 리더십을 가까이서 배우는 관행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국공립미술관조차 이를 위한 별도 예산을 갖춘 경우가 드물고, 중소 지방관은 아예 그런 항목 자체가 없는 현실이라 인사와 행정, 재정과 펀드라이징등을 책임질 관장감은 아예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런 이유이다.
평가 기준도 너무 단기 성과에 치우쳐 있다. 전시 개최 건수나 관람객 수 같은 정량 지표가 인사 평가를 지배하면, 소장품 연구나 국제 네트워크 구축처럼 시간이 걸리는 역량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남는다. 보이지 않으면 사람이 클 수 없고, 투자되지 않으면 경험은 축적되지 않는다.
이상의 원인과 처방은 서로 맞물려 있다. 짧은 계약이 큰 프로젝트에 대한 위임을 막고, 위임의 부재가 해외 연수의 명분을 약화하며, 정량평가 중심의 문화가 장기 투자유인요소를 제거한다. 따라서 이는 개별 미술관 하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학예인력 양성 정책, 그리고 미술관 계 전체의 채용과 평가 관행이 함께 바뀌어야 비로소 풀릴 수 있는 구조적 과제다.
글에서 나오면서
지역통합 이후에는 광역 미술관 협의체를 구성해 소장품 구입, 전시 일정,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조정하고, 통합 수장고·아카이브 체계를 구축해 중복 수집을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순회전시를 통해 관람객의 접근성과 시설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필수적이다. 재정과 거버넌스 측면에서도 인센티브 구조가 필요하다. 역할 분담에 성공적으로 참여하는 미술관에는 국비·도비 매칭 지원을 우대하고, 반대로 기능 중복을 해소하지 못하는 시설에는 운영비 지원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자발적 조정을 유도한다. 이제 지역미술관은 ‘지자체의 상징’이 아니라 ‘광역 문화생태계의 분업 단위’로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로 지역통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역할 분담 계획을 선제적으로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갈등과 자원 낭비를 최소화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방미술관의 직영 또는 사업소, 출장소 형태의 거버넌스, 지역문화재단 위탁 경영 등의 거버넌스도 지역내의 유사한 성격의 기능을 가진 박물관, 역사관, 전시관 등을 하나로 묶어 “시각문화재단”을 설립해 이들 기관 전체를 운영하는 것도 문화예술기관의 독립성, 창조적 자율성을 위해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오사카시가 시립미술관들을 지방독립행정법인으로 통합해 전문 인력의 안정적 고용과 장기적 사업 기획을 도모했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아울러 영국·프랑스·독일이 채택해 온 이사회 중심의 독립 법인격 모델 즉 팔길이 원칙에 기반한 예산·인사 자율성을 지닌 법인격을 도입하면, 정권과 지자체장이 바뀔 때마다 관장 후보군이 요동치는 현재의 불안정성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자율성에는 그에 상응하는 성과 책임이 함께 부과되어야 하며, 그 평가 기준은 관람객 수 같은 단기 정량지표가 아니라 학예적 성취와 연구 실적을 포괄하는 질적 지표여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지방미술관이 특정 장르나 매체에 특화된 컬렉션을 구축하고 이를 여러 지역과 순회 공유하는 전략, 국공 사립미술관이 공동 기획전과 순회전시로 자원과 전문성을 나누는 네트워크, 학예직의 임기를 보장하고 경력별 단계별 재교육, 보수교육을 제도화하는 인사 개편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소장품 확충, 학예 인력 정규직화, 안정적 운영예산 뒷받침 없이 미술관 수만 늘리는 것은, 문제를 다음 세대로 떠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관은 짓는 순간 완성되는 시설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소장품과 연구와 인력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하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일본이 거품기의 화려한 준공식 이후 30년 넘게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금, 한국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내거는 미술관 건립 계획이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될지, 아니면 텅 빈 전시실과 재정부실을 초래할 ‘돈 먹는 하마’가 되어 애물단지가 될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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