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가 단순 조립 중심 생산기지 구축 단계를 넘어 반도체, 첨단 소재, 에너지 인프라로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투자는 단순히 규모가 커졌다는 점보다 품목과 역할이 달라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휴대폰 조립과 노동집약형 생산에 집중됐던 기존 흐름에서 벗어나 반도체 후공정, 디스플레이 소재, 패키지 기판, AI 산업단지 전력 인프라 등으로 투자 대상이 확장되면서 한국 제조업의 해외 생산 전략도 재편되는 모습이다.
최근 베트남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신규 투자와 공장 착공 일정을 잇달아 공개했다. 과거 베트남 투자가 봉제, 신발, 휴대폰 조립 등 노동집약형 생산에 집중됐다면 최근 투자는 반도체 후공정, 디스플레이 소재, 핵심 부품 등 고부가 분야로 넓어지는 흐름이다.
우선 삼성은 베트남 내 최대 외국인직접투자 기업으로서 추가 투자 의지를 드러냈다. 박순철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2일 응오 반 뚜언 베트남 재무장관과 만나 베트남 사업과 투자 계획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삼성은 올해 안에 약 10억달러(약 1조505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예고했다.
삼성의 베트남 누적 투자액은 지난해 말 기준 240억 달러에 달한다. 회사는 현재 베트남에서 공장 6곳과 연구개발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등을 중심으로 중장기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삼성 디스플레이 공급사 도우인시스는 폴더블폰 핵심 소재인 초박막강화유리(UTG) 생산 기반을 넓히고 있다. 도우인시스는 지난 8일 베트남 북부 타이응웬성 쏭꽁II 산업단지에서 제2공장 착공식을 열었다. 2단계 투자액은 1억3000만 달러로 1·2단계를 합친 전체 투자 규모는 2억5000만 달러다. 옥경석 도우인시스 대표는 이날 착공식에서 "제2공장 신축은 향후 UTG 시장 확대에 대비한 선제투자"라고 말했다. 이번 투자는 폴더블폰 시장과 연결된 핵심 소재 생산능력을 베트남에서 확대하는 사례로 꼽힌다.
LG이노텍은 하이퐁에서 반도체 패키지 기판 공장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LG이노텍은 올해 3월 하이퐁 남딘부 산업단지에 총 10억 달러(약 1조5000억 원)을 투입해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부지 규모는 32만3812㎡로 축구장 43개에 해당한다. 하이퐁 시당위원회는 지난 3일 이 사업을 하이퐁 자유무역지구의 첫 프로젝트로 승인했다. 하이퐁 현지 매체 등은 LG이노텍 프로젝트와 관련해 인텔, 앰코, 삼성에 이어 LG까지 가세하면서 베트남 반도체 공급망이 더 두터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은 베트남 에너지 인프라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5월 베트남 국영 발전사 PV 파워, 현지 파트너 NASU와 함께한 컨소시엄이 베트남 응에안성 떤마이 지역에서 '뀐랍 LNG(액화천연가스) 프로젝트 실행 발표 및 기술 인프라 착공식'을 열고 총 23억 달러(약 3조4500억원) 규모의 LNG 사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하노이에서 남쪽으로 약 220㎞ 떨어진 응에안성 뀐럽 지구에 1.5GW급 LNG 복합화력발전소와 LNG 터미널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상업 운전 개시 목표 시점은 2030년 12월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번 사업이 SK그룹이 베트남 정부에 제안한 '특화 에너지-산업 클러스터' 실현 사례라고 설명했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인근 첨단 산업 단지에 공급하고 AI 데이터센터 등을 구축하는 '한국형 AI 풀스택' 밸류체인을 적용해 베트남의 산업 고도화를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투자 규모보다 달라진 품목…반도체·소재로 이동
최근 투자 흐름의 핵심은 금액보다 품목 변화에 있다.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이전부터 대규모로 진행돼 왔지만 최근에는 조립과 저부가 생산보다 반도체 후공정, 디스플레이 소재, 핵심 부품, 에너지 인프라 분야로 무게가 이동하고 있다.
LG이노텍의 패키지 기판은 AI 서버 수요 확대와 맞물려 공급 압력이 커진 품목이고, 도우인시스의 UTG는 폴더블폰 시장과 직접 연결된다. SK이노베이션의 LNG 프로젝트는 첨단 산업 단지와 AI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산업 기반 조성 계획과 맞닿아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도 한국 기업 투자를 반도체 생태계 확장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노동집약형 생산기지로 인식됐던 베트남이 설계, 검증, 패키징을 포함한 공급망 거점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특히 LG이노텍의 투자 방식은 한국과 베트남의 역할 분담을 보여준다. 회사는 경북 구미 사업장을 신기술과 고부가 제품을 담당하는 마더팩토리로 두고 베트남 하이퐁은 범용 제품 양산기지로 운영하는 구조를 택했다. 구미의 반도체 기판 라인은 현재 사실상 최대 가동 상태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신제품 개발과 고난도 공정은 국내에서 맡고 물량 대응이 필요한 양산은 베트남에서 수행하게 된다. 고부가 공정과 연구개발 기능이 국내에 남을 경우 기술 축적과 핵심 일자리 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양산 물량이 해외로 계속 이동하면 국내 생산기지의 역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외국인 투자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영삼 주베트남 대사는 올해 5월 기준, 한국의 베트남 누적 투자액이 1010억 달러(약 151조8000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기준 양국 연간 상호 방문객 수는 500만 명을 넘었고 교역액은 890억 달러(약 133조8000억 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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