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54) 세 차례 몽골 침략을 격퇴한 베트남의 저력 (2)

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안경환 전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몽골제국은 13세기에 베트남을 3차례 침략했다. 1차 침략은 남송을 정벌하기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베트남이 거절하자 침략을 감행했고, 2차 침략은 베트남 중부지역에 존속했던 짬빠(占城)국을 정복하고자 베트남에 군량미 지원과 선박 지원 등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베트남을 정복하기로 하고, 당시 다이비엣국에 요구한 6조(條)가 거부당하자 침략했다. 3차 침략은 앞서 2차례 침략이 모두 실패하자 보복 전쟁을 벌인 것이고, 역시 패전했다. 베트남의 구국 영웅 쩐흥다오 장군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금년 음력 8월 20일은 인류사상 최대 제국을 경영했던 몽골의 제2차와 제3차 베트남 침략을 모두 막아낸 총사령관 쩐흥다오 장군이 서거한 지 72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많은 베트남국민은 전국 곳곳에 있는 성웅 쩐흥다오 장군 사당을 찾아 국태민안을 빌고, 지역마다 각종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

몽골의 제2차 침략: 베트남의 6조(條) 거절이 원인
 
몽골은 1271년에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꾸었고,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였다.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중국에서 인도 및 페르시아만을 지나 유럽까지 연결되는 무역로를 장악하여 해상제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중부 베트남에 존속했던 짬빠(占城)국을 정복하여 교두보로 삼는 것이 필요했다. 몽골은 다이비엣에 군량미 지원과 선박 지원 등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다이비엣을 정복하기로 하고, 다이비엣에 6조(條)를 우선 요구했다. 6조(條)는 왕의 친조(親朝), 왕의 자제 또는 동생을 인질로 보낼 것(納質), 호구(戶口) 조사 보고, 군역제공, 조공(朝貢), 다루가치 설치였다. 이는 쩐 왕조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6조를 거부함으로써 몽골의 침략 의도가 노골화되자, 1283년 인종은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쩐꾸옥뚜언에게 군권을 주어 전쟁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쩐꾸옥뚜언은 원(元)의 침략에 앞서 1284년에 「유제비장격문(諭諸裨將檄文)」을 남겼다. 1115자로 된 유제비장격문은 제장(諸將)에게 고하는 격문으로 베트남 고전 문학의 보배이다. 격문에서 장군은, 원(元)세조 “쿠빌라이(忽必列)의 머리를 대궐 아래 내걸고, 운남왕의 육신을 고가(杲街)에서 썩게 하라.”며 필승의지를 다졌다.
 
쿠빌라이는 1284년 말 준도(唆都)에게 10만의 병력으로 짬빠(占城)국을 치도록 명하고, 아들 탈환(脫驩)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베트남 국경에 도착에 짬빠국 정복을 위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라고 명했다. 몽골군 1만여 명은 해상으로 짬빠국 수도 비자야 인근에 상륙하여 베트남 중부 꾸이년까지 진출했으나, 태풍으로 큰 손실만 입고 짬빠공략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285년 50만 대군의 몽골군은 탈환(脫驩)을 필두로 랑선을 거쳐 반끼엡(Vạn Kiếp), 낀박(Kinh Bắc), 탕롱을 점령하며 약탈과 파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탈환(脫驩)은 오마아(烏馬兒)를 해로로 보내 짬빠 공략에 파견된 준도(晙都)와 합류하여 응에안을 치고 올라와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해, 박닌, 탕롱, 티엔쯔엉(Thiên Trường), 응에안 등 곳곳이 전장터로 변했다.
 
태종의 여섯째 아들 소문(昭文)왕 쩐녓주엇(Trần Nhật Duật)은 응에안을 치고 올라오는 준도(晙都)가 이끄는 몽골군을 맞아 5만의 군사로 흥옌성 함자관(鹹子關)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남송의 조충(趙忠) 장군이 송나라 군복을 입고 싸우니, 몽골군은 남송이 국권을 회복하고 쩐 왕조에 원병을 보낸 것으로 알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준도(晙都)는 티엔쯔엉 어귀로 후퇴하였다. 응에안에서 준도(晙都)와 싸우다 올라온 쩐꽝카이(陳光啓)는 쩐꾸옥또안(陳國璨), 팜응우라오(范五老)장군과 함께 탕롱 인근의 쯔엉즈엉 나루에서 몽골 전선을 격파하고, 군관민이 합심하여 탈환(脫驩)이 이끄는 몽골군을 물리치고 탕롱을 수복하였다.
 
몽골의 제3차 침략: 2차례 패전의 보복 전쟁

몽골의 제2차 다이비엣 공략이 실패한 후 2년 뒤인 1287년 11월 원 세조 쿠빌라이는 탈환(脫驩)에게 30만 대군을, 만호(萬戶), 장문호(張文虎)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17만 석의 군량을 운송하도록 했다. 제3차 침공은 수군 중심의 수륙 양면 작전이었다. 제1차 침략은 남송(南宋) 정벌, 제2차 침략은 짬빠 정벌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으나, 제3차 침략은 두 차례의 침략에 패배한 것에 대한 보복 전쟁의 성격이 짙다. 군량미 보급에 실패로 패전한 경험을 살려, 제3차 침략은 17만 석의 군량미 운반선을 동원하고, 세 방면으로 공략하였다. 제1군은 1차 공격로인 서북지역 홍강을 따라 공격하고, 제2군은 2차 공격로인 동북지역 랑선 방향으로 공격했다. 제3군인 수군은 할롱만에서 박당(白藤)강을 따라 하노이 방향으로 공격했다. 그해 12월 탕롱이 함락되고 태상왕 성종과 인종이 피신하였다. 다이비엣은 몽골군을 맞아 철저한 청야(淸野)작전으로, 마을을 비우고 식량을 숨기거나 없애버렸다. 몽골군은 군량미 부족으로 전쟁 수행이 어려웠다. 다이비엣군은 몽골군이 점령한 요충지를 기습하거나 유리한 지형을 찾아 미리 매복하였다가 공격을 감행하는 등 게릴라전으로 펼치며 보급을 차단했다. 장문호(張文虎)의 군량미 운반 선단은 쩐카인즈(陳慶餘)에 의해 번돈(雲屯)에서 궤멸되었다. 탈환(脫驩)은 탕롱을 포기하고 반끼엡(萬劫)을 겨냥하였으나 역병이 돌고 식량 부족으로 철군이 불가피하였다. 쩐꾸옥뚜언은 박당(白藤)강 바닥에 용치를 박아놓고 초목과 볏짚으로 위장하고 강둑에는 군사를 매복시켰다. 몽골 전선들이 썰물로 수심이 얕아져 용치에 걸려 전복되는 틈을 타서 화공으로 격멸했다. 이 전투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나포하고 몽골 수군을 지휘했던 오마아(烏馬兒), 번집(樊楫), 석려기(昔戾機)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를 포로로 잡았다. 랑선 지방에서 탕롱으로 침략했던 탈환(脫驩)이 지휘하는 육군도 6할 정도의 병력을 잃고, 침투로를 따라 도주하였다. 박당(白藤)강 전투는 3차례에 걸친 몽골침략의 대미를 장식한 역사적인 전승지가 되었다.
 
쩐꾸옥뚜언의 업적

쩐꾸옥뚜언이 몽골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다이비엣은 몽골과 싸워 승리한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었다. 쩐꾸옥뚜언은 쯔엉즈엉(Chương Dương), 함뜨(Hàm Tử), 반끼엡(Vạn Kiếp), 박당(白藤)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두 권의 병서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병서요략(兵書要略)」과 「유제비장격문(諭諸裨將檄文)」을 남겼다. 「병서요략」은 몽골의 제2차 침략을 막기 위해 베트남의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유인책·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이다.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인 스스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했다.「유제비장격문(諭諸裨將檄文)」은 제2차 몽골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반끼엡(萬劫)에서 소집한 작전회의에서 몽골의 침략에 맞서 제장(諸將)들에게 총궐기하여 적을 물리치고 종묘사직을 지키고, 조상의 사당에 만대에 걸쳐 향을 피우자고 호소하는 격문이다.
 
쩐꾸옥뚜언이 사망하기 전, 제4대 영종(英宗)이 찾아와 향후 북방의 적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자, 그는 “평상시에 세밀하고 지속적인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며,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였다. 또한, “왕과 신하가 한마음이 돠고, 형제가 화순(和順)하며, 온 나라가 힘을 합치고, 백성이 모두 병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세 번에 걸친 대몽항쟁에서 다져진 단결력과 민족정신은 이후 명나라, 청나라, 프랑스, 미국,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외세배격의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충과 효, 국가와 집안의 안일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다이비엣을 구하는 길이 바로 민족 전체가 살길 임을 호소한 쩐꾸옥뚜언의 격문과 베트남의 지형에 맞는 함정 설치법, 유인책,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병서요략」은 20세기 프랑스와 미국과의 항쟁에서도 전쟁 불패의 신화를 잇게 하였다.
 
전쟁 불패의 신화를 낳은 베트남의 외세 항쟁 정신은 2045년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경제 굴기(崛起) 목표와 맥을 같이한다. 대몽항쟁에서 다이비엣국이 승리한 것은 베트남 민족의 강한 단결력과 지배층의 솔선수범 때문이었다. 이것이 베트남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머지않아 베트남에서 ‘홍강의 기적’은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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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흥다오 장군 사당을 찾아 국태민안을 기구하 는 모습]
 
필자 주요 이력
▷조선대학교 특임교수 ▷전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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