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판을 새로 짜자] 특별기획 칼럼 ④ 문명의 대 전환기 속 대한민국의 과제…'피지컬AI' 밸류체인

현대차그룹이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6 현장에서 공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역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환경과 지리적 요인이 인류사의 불평등을 결정했다"는 명제를 꺼내들었다. 특정 인종이나 국가가 선천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잉여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지리적 요인과 분단된 남북이, 아니 동서로 길게 뻗은 유라시아 대륙을 선점한 사회가 역사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설명했다. 

잉여 식량과 동서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인구가 밀집했고 치명적인 병균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는 계기가 됐다. 과학기술 역시 '필요에 의한 발명'으로 이어졌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모든 이론이 현대사회의 불균형을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을 선점한 국가가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 했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다. 

농경 시대를 지나 산업혁명 시대, 정보화 시대까지 마친 현재 인류는 AI를 기반으로 한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과거 지리적 환경이 잉여 식량 생산과 현대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낸 시발점이 됐다면 AI 시대에는 데이터, 컴퓨팅 파워, 전력 인프라가 새로운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의 진화를 넘어 미래 문명의 지형도를 재편하는 '디지털 총균쇠'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이 이를 선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이유다. 매년 수천억 달러의 거대 자본이 차세대 거대언어모델(LLM)과 AI 전용 반도체 개발에 투입된다. 

수천 년 전 내로라하는 문명국들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면 지금은 초거대 AI라는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무자비한 자본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미국 상무부는 보안 특화 AI 모델인 앤트로픽 '미토스 5'와 소비자 버전인 '페이블 5'에 대해 수출 통제 조치를 내렸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미국 국적이 없는 모든 외국인, 미국 내 체류 중인 외국인과 앤트로픽의 외국인 직원들까지 해당 모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첨단 AI 반도체 장비나 물리적 칩의 수출을 통제해 온 미국 정부는 이제 'AI 모델' 자체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간주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AI가 단순히 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안보와 패권을 좌우하는 새로운 국력의 척도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AI가 디지털 시대의 핵심 병기라는 설명과도 같다. 

미국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자적인 AI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외산 AI 모델에만 의존할 경우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나 규제로 인해 국가의 핵심 인프라가 마비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과거 제국 식민 시대 당시 열강들이 신기술인 증기기관과 철도로 약소국들을 유린하고 자원을 수탈한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 유라시아에서 진화를 거듭한 치명적인 세균에 면역력이 없었던 신대륙 원주민들이 일방적인 몰락을 맞이했던 것처럼 자체 AI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국가는 AI를 선점한 강대국, 더 좁혀보면 글로벌 빅테크의 알고리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과거 식민지 시대와 다를 바 없다. 겉으로는 주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기술적·문화적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 간 격차를 넘어 한 사회 내부에서 발생할 '파괴적인 양극화'는 더 우려되는 부분이다. 서둘러 전 국가 차원의 AI 전환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사회 계층 간 불평등은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될 것이다.

미래의 AI는 자본력에 따라 철저히 차등화된다. 막강한 부를 가진 이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고도로 정밀하고 똑똑한 프리미엄 AI 모델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며 지적·경제적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된다. 반면 경제적 약자들은 아예 AI 기술에서 소외되거나, 기업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성능이 떨어지는 AI 모델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극소수 엘리트가 AI로 촉발된 새 문명의 모든 과실과 자원을 독점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세계 시장과 경쟁할 수 있는 '소버린 AI'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중요성을 미리 깨닫고 지난해부터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소버린 AI는 단순히 기술적 자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보호하는 방파제이자 국가 차원의 양극화를 막고 사회 계층 간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공재다. 국가가 주도하여 고성능 AI 모델의 혜택을 모든 기업과 국민이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할 때 비로소 부유한 자들만의 자원 독점을 막고 진정한 디지털 민주주의와 균형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 AI 업계에는 글로벌 패권 경쟁의 판도를 뒤흔들 반격의 카드도 있다. 바로 '피지컬 AI'다. 

AI의 진화 단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화면 속 모니터에만 존재하는 '소프트웨어 AI' 단계가 첫 번째다. '피지컬 AI'는 흔히 AI의 최종 완성본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육체를 얻고 현실세계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우리는 사람처럼 춤추고 텀블링을 하는 로봇에 박수를 보냈다. 

지금은 더 이상 이 같은 이벤트에 환호하지 않는다.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필수 노동, 즉 가사 노동과 돌봄, 청소 등을 물리적으로 대신하는 로봇을 꿈꾼다. 우리에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가전 대기업이 두 개나 존재한다.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청소기, TV 등 전 세계 가정의 안방과 거실을 지배하는 온갖 가전기기를 가장 잘 만드는 제조 강국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가전과 로봇을 제어하고 인간과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제조 역량과 가전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대규모 언어 모델을 학습시킨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하드웨어 제조 노하우와 미세 공정 기술, 그리고 전 세계 공급망이 결합되어야만 가능한 영역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및 AI 반도체 제조 능력부터 시작해 이를 물리적 형상으로 구현해 낼 압도적인 가전·모빌리티 하드웨어 인프라까지 전 밸류체인을 모두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기술의 뇌(Brain)와 신체(Body)를 동시에 만들 수 있는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국가가 바로 우리다. 

따라서 지금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우리가 가진 강력한 하드웨어 제조 역량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주권과 가치를 담은 독립된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 유수의 제국들이 총과 쇠를 앞세워 세계를 재편할 때 그 흐름을 읽지 못한 국가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종속당했다. 21세기의 디지털 총균쇠인 AI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 패권국들의 일방적인 독점과 통제 속에서 우리만의 소버린 AI를 확보하고, 우리가 잘하는 피지컬 AI 영역에서 초격차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대한민국이 미래 문명의 주역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디스토피아를 막고 균형 잡힌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역사는 준비된 자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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