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트럼프 횡포에 맞서는 '카니의 용기있는 제안'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최근 국제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는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일 것이다. 지난달 말 카니 총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서 미국의 약탈적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이 “세계 질서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맹비난하며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수십년간 미국이 주도해온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있다고 주장한 카니는 “가치 기반 현실주의(value-based realism)”에 기초한 중견국 연합을 촉구했다. 그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그의 메시지는 비슷한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불안을 안고 있는 또 다른 중견국인 한국에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카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무역, 안보 등 여러 사안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을 거칠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현실에서, 캐나다와 같은 중견국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비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패권국과의 양자 협상에 매달려 끌려다니기보다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니는 “강대국 경쟁의 세계에서 그 틈에 껴 있는 나라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호의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영향력을 갖는 제3의 길을 만들기 위해 결합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중견국들은 함께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식탁에 앉지 못하면, 우리는 메뉴가 된다”고 경고했다.

오랜 기간 가장 가까운 동맹인 미국을 상대로 한 카니의 공격적인 연설은 이해할 만하다. 1년 전 백악관에 복귀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국익 극대화를 명분으로 미국의 우방들을 가혹하게—때로는 잔인하게—대해왔다. 그는 캐나다를 하찮고 약해 빠진 이웃으로 몰아붙이며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고 폄하했다. 동맹국들이 무역과 안보에서 미국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수십년간 세계를 결속시켜온 다자 무역체제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채 경쟁국뿐 아니라 캐나다 같은 동맹국들에도 대규모 관세를 부과했다.

트럼프의 가장 최근의 도발은 물론 덴마크령인 그린란드를 장악하겠다는 요구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캐나다 역시 트럼프의 제국주의적 발상에 반대하고 있다. 그는 “강대국들이 경제 통합을 무기로, 관세를 지렛대로, 금융 인프라를 강압 수단으로, 공급망을 악용 가능한 취약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개탄했다.

카니의 연설은 널리 호평을 받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용기 있는 카니(Courageous Carney)’와 ‘정신 나간 도널드(Demented Donald)’를 대비시켰다. 스웨덴과 멕시코 같은 중견국들도 중견국 연합을 촉구한 카니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연설을 맹렬히 비판하며, 캐나다 수출의 거의 70%를 구매하는 미국에 캐나다가 배은망덕하다고 주장했다.

예상대로 한국 정부는 역시 침묵하고 있다. 안보와 무역 양면에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특히 핵심 무역 및 관세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워싱턴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6월 취임 이후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심초사해왔다. 지금은 트럼프를 자극할 때가 분명 아니다.

강대국에 맞서 중견국 연합을 구축하자는 카니의 구상은 상당히 공정하고 설득력있게 들리지만, 실행은 쉽지 않다. 이런 연대는 곧바로 반미 또는 반중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참여국들은 강대국 경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갈 위험이 있다. 한국과 같은 나라에는 미국의 의심이나 중국의 보복을 불러와 무역이나 안보 이익을 해칠 수 있다. 또한 중견국은 경제나 인구 규모로는 정의하기 쉽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구조는 크게 달라 일관된 행동을 취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니의 연설은 한국이 검토해볼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가치 기반 현실주의’라는 기치 아래, 캐나다는 공통의 가치와 이익에 따라 사안별로 서로 다른 연합을 구축하려 한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유럽연합(EU)을 잇는 가교를 놓아, 잠재적으로 15억명 규모의 새로운 무역 블록을 만들겠다는 구상도 포함된다. 요컨대 캐나다는 지리적 다변화를 통해 더 깊은 글로벌 관여를 추구하고 있다.

지리적 다변화는 한국이 수년간 추구해 왔지만 성과는 별로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취약성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다, 일본, 호주와 같이 뜻을 같이하는 중견국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시장경제에 기반한 민주국가들의 연합은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며, 유럽과 북유럽의 중견국과 연대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탈퇴 이후 CPTPP로 이름이 바뀐 TPP를 EU와 연계하자는 카니의 제안은 한국에 특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한국은 현재 일본과 호주가 주도하는 CP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만약 카니의 구상대로 EU와 긴밀히 연계된 CPTPP에 합류하게 된다면, 이는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고 위험한 강대국 경쟁에서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보스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은 미국 대표들 앞에서 공개적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는 조용히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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