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수여국서 개발 파트너로 …세계은행과 대한민국 관계는 진화중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은 세계은행그룹(World Bank Group) 개발 성공 스토리의 대표적 모범사례로 자리매김해 왔다. 세계은행의 차관은 한국이 한 세대 만에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에서 산업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 설립 82년을 맞은 이 은행은 급변하는 글로벌 개발금융 환경에서 날로 거세지는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자신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여전히 한국을 내세우고 있다.
 
그 최신 사례가 지난달 인천 송도에서 기획재정부와 협력으로 개소한 세계은행 글로벌 디지털 지식센터다. 세계은행의 유일한 디지털 싱크탱크인 이 센터는 디지털화와 인공지능(AI) 분야에서 한국이 축적한 전문성을 활용해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서 디지털 역량을 구축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카를로스 펠리페 하라밀로 (Carlos Felipe Jaramillo) 세계은행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총재는 “한국의 검증된 디지털 전문성과 세계은행의 글로벌 네트워크 및 지식을 결합함으로써 정부, 기업, 시민 모두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은행에 있어 이 최첨단 허브는 자신을 재창조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1944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은행은 변화하는 세계 경제 환경에 맞춰 여러 차례 변신을 추구해 왔다. 유럽 재건이 미국 주도의 대규모 원조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으로 대체되자, 세계은행은 한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의 빈곤 감축으로 초점을 전환했다.
 
예컨대 1962년부터 1974년 사이 세계은행은 댐, 도로, 항만, 발전소 등 핵심 인프라 프로젝트에 약 10억 달러를 한국에 대출했다. 이러한 투자는 흔히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후 세계은행은 대출기관을 넘어 점차 세계적 지식 기관으로 진화했다. ‘세계개발지표(World Development Indicators)’와 같은 데이터세트, 연구 출판물, 정책 자문 등을 통해 전 세계 개발 담론을 형성해 왔다. 최근 들어 세계은행은 금융위기, 팬데믹, 기후 관련 도전에 대응하면서 다시 한번 그 역할을 확대했다.
 
AI와 디지털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세계은행은 또 다른 사명, 즉 특히 개발도상국에서의 디지털 전환을 새로운 과제로 규정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여전히 오프라인 상태이며, 저소득국가에서는 생성형 AI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은 유난히 설득력 있는 모델로 부상한다. 디지털 산업은 한국이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중진국 함정을 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송도의 디지털 허브는 세계은행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갈수록 혼잡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개발금융 시장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계은행은 새로운 성공 사례가 절실하다. 민간 자금 조달이 급격히 확대되고 대안적 다자 개발은행들이 전통적 역할에 도전하면서, 세계은행은 더 이상 국제 개발자본의 지배적 공급자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이 서구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가장 두드러진다. 특히 아시아에서 AIIB는 주요 개발금융 기관으로 부상했다. 세계은행의 신중하고 관료적인 의사결정과 달리, AIIB는 유연하고 신속한 운영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수여국 정부들은 종종 세계은행 자금을 “안전하지만 느린 돈”, AIIB 자금을 “빠른 돈”으로 묘사한다.
 
더 넓게 보면, 거의 80년 동안 전후 경제 질서의 기둥이었던 세계은행을 포함한 브레턴우즈 체제 기관들은 미국 또는 서구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세계은행은 저리 대출과 보조금의 대가로 가혹한 정책 조건을 강요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민영화, 재정 긴축, 시장 자유화를 강조한 개혁은 현지 현실을 간과해 일부 국가에서는 불평등 심화, 국가 역량 약화, 사회적 불안을 초래했다.
 
거버넌스 역시 민감한 문제다. 최대 주주인 미국은 주요 결정에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하며, 관행적으로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지명한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은행의 우선순위를 정권의 정치적 어젠다에 맞추려고 한다. 최근 세계은행의 초점이 기후 행동에서 디지털화와 같은 덜 논쟁적인 분야로 변한 것도 워싱턴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국은 세계은행이 과도한 정책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대규모 자금을 지원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국내 제도가 탄탄하고 정책 우선순위가 일관됐기 때문에 한국 당국은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한국 정책입안자들은 소비 주도 성장보다 수출 주도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명확하고 체계적인 발전 전략을 일찌감치 추구했다. 그 결과 다른 나라들에 적용된 획일적 처방을 피하고, 독자적이며 지속 가능한 개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은행과 한국의 관계는 여전히 진화 중이다. 수여국으로서의 성공과 달리, 공여국이자 개발 파트너로서의 역할은 아직 진행형이다. ‘코리아 녹색성장 신탁기금’과 같은 이니셔티브는 한국의 녹색성장 전문성을 개발도상국에 전파하고 이를 현장의 시범사업으로 전환하며 초기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제 환경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세계은행이 그 위상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성공사례를 한국으로부터 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송도의 글로벌 디지털 지식센터는 한국과 세계은행 모두에게 중요한 실험이다. 이 센터가 구체적인 개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 여부는 양측의 협력의 앞날을 결정할 뿐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맞춰 스스로를 재창조하려는 세계은행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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