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58) 금슬처럼 서로 화합하라 - 화여금슬(和如琴瑟)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한 해가 다시 저물고 있다. 바야흐로 송년회 시즌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 대신 부부동반을 권장하는 모임이 늘고 있다. 지인들과의 송년모임에 부부가 함께 참석하여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자연스레 '금슬(琴瑟)'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모임에 혼자 왔다고 금슬이 나쁘다고 예단할 수는 없지만 함께 온 부부의 금슬이 좋은 것만은 분명하다. 금슬이 좋지 않은 부부가 함께 올 리는 없으니 말이다. 금(琴)은 거문고이고 슬(瑟)은 비파다. 두 악기를 합쳐서 만든 조어 금슬은《시경(詩經)》에서 비롯됐다.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30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경에는 '금슬'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시경 '소아(小雅)•상체(常棣)편'에서는 “처자식 화목하여 금슬 소리 어울리듯 한다(妻子好合, 如鼓琴瑟)"고 했고, '국풍(國風)•관저장(關雎章)'에서는 "얌전하고 정숙한 숙녀를 금과 슬로 사귀리(窈窕淑女, 琴瑟友之)"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지혜로운 아내의 내조를 다룬 본고 29회차에서 소개한 바 있는 '정풍(鄭風)•여왈계명(女曰雞鳴)'에서는 한 쌍의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는 정경을 묘사하는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금이야 슬이야 타 보세나. 이보다 좋을 수 있겠소(琴瑟在御, 莫不靜好)." 부부의 화목을 금과 슬의 조화에 비유하는 발상과 용례들이다. 이후 금슬은 부부간의 화목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금은 5~7현의 맑고 단정한 악기다. 일찌기 군자의 고아한 취미를 일러 '금기서화(琴棋書畫)'라 했다. 금기서화는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리고 그림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첫번째로 꼽힐 만큼 금의 위상은 남달랐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가 죽자 스스로 거문고 줄을 끊음으로써 '지음(知音)'의 고사를 남겼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대문장가 사마상여와 중국역사상 4대 재녀(才女) 중 한 명인 탁문군의 러브스토리에서는 금이 사랑의 가교가 되어주었다. 

25현으로 이루어져 음역이 넓고 크기도 커 흔히 큰 거문고라 불리는 슬은 금과 구조가 다르다. 음색도 다르고 울림의 방식도 다르다. 금의 음색은 가늘고 여음이 길며 매끄럽다. 슬의 음색은 두텁고 넓으면서 무겁다. 금이 단정한 여인과 같다면 슬은 건장한 남자에 비유된다. 하지만 금과 슬을 합주하면 각각의 고유한 음색이 묻히지 않고 서로 호응하며 음률이 한몸처럼 어우러진다. 예로부터 함께 연주했을 때 가장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악기로 꼽힌 이유다. 서로 다른 거문고와 비파의 가락이 잘 어울려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므로 금슬에 비유해 화합이 잘 되는 부부를 이르는 성어가 다수 생겨났다. 이를테면 '화여금슬(和如琴瑟)', 금슬지락(琴瑟之樂)', '금슬상화(琴瑟相和)', '금슬화해(琴瑟和諧)' 등이다. 이들 성어는 결혼식 축사에서 “화목하라”는 권면의 의미로 즐겨 인용된다. 

장구한 중국 역사에서 금슬 좋은 부부를 찾는다면 아마도 송대의 금석학자 조명성과 중국 최고의 여류문인 이청조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이들은 요즘 말로 '케미 갑 커플'이었다. 서로 정서가 맞고 취미와 관심분야도 같아 함께 시문을 다듬거나 금석문을 연구했다. 이청조는 출중한 기억력으로 남편의 '금석록(金石錄)' 편찬을 도왔다. 이 부부가 문헌 자료의 출처를 맞추는 내기를 하여 이긴 사람이 먼저  차를 마셨다는 '도서투차(賭書鬪茶)' 일화는 유명하다. 금슬 좋은 부부로 살면서 이청조는 빼어난 시문을 연이어 발표했는데, 은근히 시샘이 난 조명성이 자신의 작품과 아내의 작품을 한데 섞어 친구에게 평가를 부탁했으나 완패를 당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이후 조명성이 아내의 넘사벽 문학적 재능을 인정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부족할 게 없던 이 부부는 시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송나라가 강남으로 쫓겨가는 전란의 와중에 조명성이 병사했고 홀로 남은 이청조는 파란 많은 여생을 보냄으로써 후세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금슬 좋기로는 송말원초의 문인 조맹부와 관도승 부부도 빠지지 않는다. 조맹부는 당대 최고의 명필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서예는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창덕궁 후원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 시험을 볼 때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황모 무심필에 먹을 묻혀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 체(體)를 받아 일필휘지 선장(先場)하니..." 조맹부가 천고 명필 왕희지에 버금가는 인물로 추앙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약한 송나라가 망하고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됐다. 한족 출신 조맹부가 3대 황제 쿠빌라이칸의 총애를 받고 원나라의 관리가 되자 한간(漢奸)이라는 꼬리표가 등 뒤에 항상 붙어 다녔다. 한간은 중국에서 적과 내통하는 사람을 이르는 멸칭이다. 그런 조맹부를 가까이에서 위로하며 연인이자 벗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아내 관도승이다. 조맹부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그녀는 먹으로 대나무를 그리는 ‘묵죽(墨竹)'과 서예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예술적 취향이 같은 이들 부부의 금슬은 남달랐다. 한가한 때면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으며, 호수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아무리 부부 금슬이 좋아도 축첩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조맹부가 쉰살을 갓 넘은 나이에 찻집의 기녀와 사랑에 빠져 첩으로 들이려 했다. 이에 관도승은 말없이 사(詞) 한 수를 지어 남편에게 건넸다. (사는 송나라 이후 유행한 문학형태로, 일종의 산문시다.)

그대와 나, 너무나 정이 깊어 뜨겁기가 불과 같아라.
한 덩이의 진흙으로 그대 하나 빚고 나 하나 빚네.
우리 둘 함께 부숴 물에다 반죽하여
다시 그대를 빚고 나를 빚으면
내 속에 그대 있고 그대 속에 나 있네.
살아서는 한 이불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네.

爾儂我儂 忒煞多情 情多處 熱似火
把一塊泥 捻一個爾 塑一個我
將咱們兩個一齊打破 用水調和  
再捻一個爾 再塑一個我
我泥中有爾 爾泥中有我
我與儞生同一個衾 死同一個槨

관도승이 지은 이 글의 제목은 '아농사(我儂詞)', 즉 '그대와 나의 이야기'다. 문헌에 따라서는 이런 글귀가 뒤에 이어진다. "우리 사랑이 아무리 부서진다 해도 나는 다시 만들테고, 다시 만들면 만들수록 사랑은 더욱 깊어질 것이니 당신 생각대로 하십시오. 첩을 열을 얻든 스물을 얻든." 척하면 통하는 문인 부부다. 조맹부는 잠시 딴생각을 품었던 자신을 책망하고 이후 다른 여인을 멀리했다. 관도승은 사 한 수로 품격있게 남편을 꾸짖고 사랑의 의미를 일깨웠다. 진심을 담은 글의 힘이요 지성을 갖춘 여인의 우아한 승리다. 조맹부와 관도승 부부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졌고 "아니중유이, 이니중유아(我泥中有爾, 爾泥中有我)'', ''내 속에 당신이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다’'는 아농사의 한 구절은 중국의 연인들이 애용하는 밀어로 사랑받고 있다.

거문고와 비파는 구조가 다르고 음역도 다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흉내 내려고 한다면 애초에 조화는 불가능하다. 조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금슬에는 서로 닮지 않아도, 혹은 닮지 않았기 때문에 조화가 가능하다는 은유가 담겨 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부의 조화는 둘 중 하나가 자기 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음색을 조정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기성'으로 불린 오청원 9단도 ‘바둑은 조화’라고 했다. 비단 바둑뿐이겠는가. 인생도 그렇고 나라의 정책도 현실과 이상의 조화가 필요하다. 정치의 품격 또한 조화에 있을 터, 밤낮없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여야가 곧 밝아올 새해부터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듯 조화롭게 정치하는 풍경을 그려 본다. 부질없는 상상이겠지만.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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