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비욘드 ESG] 트럼프의 일방통행 리더십 …서로마 '몰락의 행로' 떠올라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불린다. 서양사의 유명한 인물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에 폐위당했다. 역사학계에서 재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그에게 서로마 멸망의 직접적 책임을 묻지는 않는 듯하다. 폐위 당시 얼떨결에 제위에 오른 10대 초반의 황제였고, 군인인 아버지가 내세운 꼭두각시였기에 서로마 패망에 대한 책임을 묻기엔 무리다. 다만 이름에 로마의 창업자 격인 ‘로물루스’와 ‘아우구스투스’가 들어 있어 이 인물이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것을 공교로운 역사의 우연으로 흥미롭게 회자한다.

서로마제국 멸망의 책임

오도아케르는 전란의 시대에 로마에서 입신한 게르만계 용병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에데코를 통해 아틸라에 연결된다. 에데코는 유럽 고대사의 악몽인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아틸라와 연결되고 게르만 혈통인 오도아케르가 역사의 중심에 서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하고 서로마의 지배자가 된 건 로마엔 가슴 아픈 얘기이지만 흥미진진하긴 하다. 그의 혈통이 로마계였다면 황제가 되어 로마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겠지만 그는 형식상 동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한 서로마 혹은 이탈리아의 왕으로 만족했다.

서로마 패망의 원인을 두고 서양 사학계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았다. 서로마 멸망의 이 긴 도정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년)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제국 쇠망의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사가 되기는커녕 제국을 지탱한 마지막 기둥을 무너뜨린 인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아틸라를 격퇴해 제국을 보호한 ‘마지막 로마인’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를 질시에 사로잡혀 암살함으로써 서로마를 회생 불능으로 몰아넣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자신 또한 이듬해 암살당했고, 이후 극심한 혼란기를 거쳐 게르만인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오도아케르의 출세 과정에 ‘포이데라티’란 개념이 등장한다. ‘포이데라티’는 로마 제국과 조약(Foedus)을 맺고 군사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제국 내 영토에 정착할 권리와 식량, 금전적 지원을 받는 부족이나 집단을 뜻한다. 반달족, 프랑크족, 서고트족 등 게르만계가 많았다. 서로마제국 말기에 ‘포이데라티’가 성행한 이유로는 로마 시민들이 군 복무를 기피하면서 제국이 병력 부족에 시달린 것이 거론된다. 또 길게 늘어진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막대한 군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포이데라티’라는 타협안을 찾았다는 설명이다. 4세기 후반 훈족의 준동에 따라 연쇄적으로 이동한 게르만 부족들이 대규모로 로마 국경을 넘어오면서 이들을 제어하면서 군사적으로 활용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 또 다른 원인이다.

서로마제국과 미국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의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을 보면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떠올린 것이 과한 발상일까. ‘마지막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이티우스는 451년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에서 훈족의 아틸라를 물리침으로써 제국을 회복할 군사적 전기를 잡았다. 아이티우스 죽음은 서로마 군대 내에서 격랑을 헤쳐 나갈 유능한 리더십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것은 동시에 서유럽에서 로마 리더십의 종말이기도 했다. 로마가 제국이 아니라 반달 등 다른 게르만 부족과 경쟁하는 이탈리아로 격하됐다는 뜻이다.

현재 미국은 서로마제국의 패망기 모습을 답습하는 듯하다. 내부적 역량의 소진과 훈족·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외부적 위협에서 서로마는 시대 상황을 읽어내어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며 적절히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대내외 위협 요인에 대한 미국의 진단과 대응을 의미한다. 어떤 미국인들이 삶에서 체감할 만한 구호이며 그랬기에 트럼프의 권좌 복귀가 가능했다. 서로마 패망기 유럽 상황처럼 현재 미국은 이미 자체 역량으로 난국을 타개하기 어렵다. 관세 등 약탈적 정책을 펴면서 패권국가의 지위를 버리고 각자도생에 접어든 형편은 이해한다고 치지만, 도저한 시대 흐름에도 눈을 감는 행태로는 ‘오도아케르’의 등장을 모면하지 못할 전망이다. 트럼프의 미국에 대해 이런 판단을 내린 지 오래지만 최근 두 장면을 보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족·게르만족보다 무서운 기후위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가 미국의 전면 보이콧과 공개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 대응 등 글로벌 현안을 담은 정상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상징적 풍경이다. 미국의 반대에도 지난 22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초안이 수정 없이 통과되자 백악관은 남아공이 “G20 의장국 지위를 무기화했다”고 비난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의 반대에도 남아공이 선언문을 밀어붙인 것보다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이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더 상징적이다. ‘황제’의 권위를 잃어버리자 아예 불참하는 몽니를 부렸고 이런 몽니는 G20 정상회의 이후의 ‘뒤끝’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지난 26일(현지시간) 내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남아공을 아예 초청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G20 선언문에는 기후변화 위기를 강조하는 표현이 다수 포함됐다. 기후변화를 인간 활동 결과로 보는 과학적 합의를 부정한 트럼프 행정부에는 금기어에 가깝다. 선언문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높이 평가하며 개발도상국의 높은 부채 부담을 지적하는 등 미국이 반대한 내용을 그대로 포함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개회식 연설에서 “아프리카의 첫 G20 의장국으로서 그 가치를 훼손하는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G20 정상회의에 앞서 미국은 11월 10~22일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도 불참했다. 미국 외에는 산마리노,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 3개국이 불참해 이들 4개국을 제외한 195개국이 COP30에 참석했다. G20 정상회의 보이콧보다 사실 COP30 보이콧이 미국이나 지구촌에 더 심각한 문제다.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 1위국이자 현재 배출량 2위 국가인 미국의 불참은 기후위기에 관한 미국의 리더십 실종 혹은 전면적 포기를 뜻한다.

미국 대표단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링 밖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 2주의 난상토론 끝에 채택된 합의문엔 핵심 쟁점인 '화석연료 감축'이 본문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기후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싸움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시몬 스티엘 유엔기후협약(UNFCCC) 사무총장의 발언은 미국의 보이콧을 포함한 불편한 진실을 정치적으로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로이터, 가디언 등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 주범이자 파리협약 목표 달성을 가로막는 원흉인 화석연료에 관한 논의가 COP30에서도 아예 금지되다시피 했다고 보도했다. 많은 국가가 “과학을 외면한 합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거세게 반발하며 협상은 마지막 이틀 사실상 좌초 직전에 몰렸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그룹과 러시아는 "본문 어디에서도 화석연료 언급은 불가"라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유럽연합(EU)을 포함한 80여 개 개발도상·선진국은 '화석연료로부터 전환(transition away from fossil fuels)' 문구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맞섰다. 극한의 대치 끝에 마련된 해법은 결국 본문 외곽 사이드 텍스트(side text)에 화석연료 관련 문구를 첨부하는 방식이었다. 선언적 의미 이상의 구속력 없는 사실상 정치적 후퇴였다.

합의문은 노동자 보호, 사회적 안전망 등을 포함한 정의로운 전환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광물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단 한 줄도 포함되지 못했다. 또한 국가별 온실가스감축 목표(NDC)의 부족분을 보완하기 위한 가속화 프로그램이 도입됐지만 사실상 기존 약속의 이행을 독려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은 파리협약에서 정한 목표인 1.5도를 이미 넘어섰지만 COP30은 이런 냉엄한 현실에 눈을 감았다. 미국은 논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퍼스트’의 비용

미국이 연이어 보이콧하고 가운데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초래할 기후위기 파급효과가 인류 생명에 막대한 피해를 안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권력 남용을 조사하는 비영리 단체 프로퍼블리카(ProPublica)와 가디언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확대와 탄소 감축 정책 폐기 등 반(反)기후 정책으로 향후 수십 년 내에 전 세계에서 최대 130만명의 고온 관련 사망자가 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부분 피해는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남아시아의 가난하고 더운 나라들에서 발생할 것으로 분석됐다.

분석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으로 향후 10년 추가 배출될 온실가스량을 기초로 계산됐다. 연구는 2035년 이후 80년 동안 지구가 더 뜨거워지면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열 관련 사망자 수를 최대 130만명으로 추정했다. 폭염으로 인한 직접 사망(열사병 등)과 고온으로 악화하는 심혈관·호흡기 질환 등을 포함한다. 지구가 따뜻해지며 일부 지역에서는 추위로 인한 사망자가 감소할 것이기에 이 숫자를 차감했다.

연구는 COP30 등 미국의 부재가 큰 주목을 받는 가운데 발표됐다.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4%지만 역사적 온실가스 배출량의 20%를 차지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 아래 풍력·태양광·전기차 등 대규모 녹색전환 투자를 통해 배출량 감축 궤도에 올라와 있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협약에도 복귀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재취임 첫날 다시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고 이후 100일 동안 첫 임기 내내 철회했던 것보다 많은 기후 정책을 한꺼번에 폐기했다.

4~5세기 훈족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서양사에서 서로마의 멸망을 초래했다면 21세기를 내내 괴롭힐 온실가스 등 기후위기는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까. 당시 로마인에게 눈에 보이는 아틸라 군대의 창검이 두려운 것이었겠지만 '과학에 기반한다면' 지금 인류에게는 온실가스가 더 공포스러운 적이다. 트럼프의 미국이 보이는 행태는 공포의 분식(粉飾)에 가깝다. “우리는 안온한 곳에 숨어서 종전처럼 제국의 영화를 누릴 테니 아쉬우면 너희가 나가서 훈족과 싸우라”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처럼 ‘마지막 로마인’ 아이티우스를 죽이는 듯한 행태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를 통한 미국 몰락의 본격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제 제국 패망 이후의 세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아마 우리에게 ‘코리아 퍼스트’가 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메리카 퍼스트’와 달리 협력과 상생을 기반으로 글로벌 리더십 공백의 난세를 뚫고 나가는 것이어야 함은 트럼프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아도 자명하지 않을까.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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