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혁 칼럼니스트]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시간이다. 밥벌이의 최전선에서 은퇴한 사람들에게는 여느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였겠지만,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열흘간 이어진 황금연휴였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해서 불원천리 달려갈 고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집안 어른들 찾아뵙는 일 말고는 긴긴 연휴에 딱히 할 일이 없다. 요즘이야 훌쩍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게 명절 연휴를 알차게 활용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자리잡기도 했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휴식보다는 노동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였기에 대체공휴일이나 임시공휴일 지정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긴 연휴가 드물어 혹여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일지라도 2,3일 짜리 국내여행을 다녀오는 게 고작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서울을 사수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친지들과 영화관에 가서 땅콩을 까먹고 오징어를 씹으며 영화를 보는 게 그나마 기억에 남는 소일거리였다. 그래서 그때쯤이면 극장가도 쟁여 둔 흥행작을 스크린에 올려 명절 특수를 노리는 걸 관행으로 삼았다. 그 시절 추석 극장가의 히로인은 단연 코믹 쿵푸의 달인 성룡이었다. 메가 히트작 '취권'이 그러하듯 성룡이 나오는 영화가 대체로 여럿이 함께 보기 좋은 명랑오락물이어서였을 것이다.
필자 역시 구세대에 속하고 고향 또한 서울이라 시간이 남아도는 이번 추석연휴 때도 마치 정해진 루틴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마침 오랜만에 성룡이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길래 옛 전우를 만난 듯 반갑게 선택을 했다. '포풍추영'이라는 홍콩·중국 합작영화였다. 마카오를 무대로 하는 범죄조직이 컴퓨터 해킹으로 은행의 최첨단 보안시스템을 무력화하고 거액을 탈취한 후 CCTV를 조작하고 현란한 와이어 액션과 변장술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자 은퇴한 왕년의 범죄 추적 전문가 성룡이 복귀하여 고전적인 아날로그 방식으로 검거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포풍추영(捕風追影)은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쫓는다는 뜻이다. 바람도 그림자도 실체가 없으니 잡으려 해봐야 잡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영화는 이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암약하는 지능적 범죄조직과 이들을 쫓는 경찰의 한판 승부를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80,90년대를 풍미하던 전성기 때보다는 어딘가 몸동작이 굼떠 보이지만 여전히 손과 발을 기막히게 놀리고 주변의 물건과 지형지물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성룡의 코믹 쿵푸를 보는 즐거움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포풍추영이 혹시 어떤 유래가 있는 사자성어가 아닐까 해서 사후 학습에 들어갔다. 결론은 이렇다. 포풍추영은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성어 '포풍착영(捕風捉影)'을 변주한 신조어다. 범죄 추적 전문가와 정체불명의 범죄 조직이 치열하게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벌어지는 영화인지라 그림자처럼 스며들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대상을 끈질기게 감시하고 추적하는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 '잡을 착(捉)'을 '쫓을 추(追)'로 한 글자만 살짝 바꿔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말이 나온 김에 포풍착영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전한(前漢)의 열 번째 황제 성제(成帝)는 19세에 즉위했지만 40세가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다. 성제는 신선 사상이나 기이한 주술을 주장하는 방사(方士, 점쟁이)들의 말을 믿어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에 열중했고, 그런 자신의 비위를 맞춘 자들만 우대했다. 이를 보다 못한 광록대부(光祿大夫,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국정을 의논하는 일종의 고문직) 곡영(谷永)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지금 세상에는 신선이나 귀신을 들먹이고 괴상한 계책을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선을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허황된 말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바람을 붙잡고 그림자를 쥐는(捕風捉影)'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허황되고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황제의 귀를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더 이상 조정의 일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제는 곡영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의 의견을 따랐다.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편찬한 전한 시대 역사서 《한서(漢書)·교사지(郊祀志)》에 수록된 이야기다. 교사지는 제사와 종교 의례에 관한 기록으로 포풍착영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2023년 말, 해군 출신 최초의 국방부장이 되는 기록을 세우는 등 시진핑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둥쥔(董軍)이 작년 11월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이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곧바로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사자성어를 인용했는데, 바로 포풍착영이었다. 헛소리 말라는 얘기다. 현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를 잘 알아두어야 한다.
포풍추영이 '쫓는다(追)'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잡히지 않는 대상을 향한 치열한 추적을 상징하는 반면, 곡영이 올린 상소문에서 유래한 성어 포풍착영은 바람이든 그림자든 '잡는다(捉)'는 행위가 불가능함에 초점을 맞춰 허망하고 근거 없는 언행을 비유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뜬구름 잡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우리 정치권에도 포풍착영의 그늘은 짙다. 21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불거진 청담동 술자리 허위 의혹 제기가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요즘은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한 집권여당의 거칠고 집요한 공세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후보 시절 대법원이 공직선거법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린 것을 다짜고짜 대선 개입으로 규정하고 '조희대의 난'으로 이름지으며 지지층을 선동한다. 유튜브발 녹취록을 근거로 실체 없는 '4인 회동설'을 유포하여 대법원장 청문회를 밀어붙이는가 하면 13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 증언대에 기어이 대법원장을 세우겠다고 벼른다. 노골적인 대법원장 흠집내기이자 사법부 군기잡기로 읽힌다.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거냐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주당이 저렇게 나오는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국민들이 많을 것 같다.
이재명 정권의 그림자 실세라는 김현지 대통령실 부속실장도 국정감사 태풍의 눈이다. 그녀의 출석 여부를 둘러싸고 여야는 연일 으르렁대며 싸운다. 일개 비서관을 철벽 방어하는 민주당의 모습도 정상적이지 않고 인사를 전횡한다는 묻지마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의힘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유튜브에는 김현지 부속실장을 둘러싼 온갖 억측과 풍문을 다룬 동영상들이 버젓이 돌아다닌다. 추석 연휴 내내 여야는 대통령 부부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두고 거친 막말을 주고받았다. 'K푸드 세계화를 위한 홍보'라는 주장과 '국민 정서를 외면한 정치쇼'라는 비판이 격하게 맞붙은 여야 공방은 끝내 고소·고발전으로 비화했다. 바람을 붙잡고 그림자를 쥐려는 사람들로 인해 '혐정(嫌政)' 정서가 위험 수위를 향해 치닫고 있다.
오늘도 SNS 세계에서는 가짜뉴스가 범람한다. 누군가를 향한 근거 없는 비난, 밑도 끝도 없이 퍼지는 음모론이 군중심리를 올라타고 진실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누가 누구를 만났다는 ‘카더라’ 통신이 팩트로 둔갑하여 정치권을 뒤흔들고,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유튜버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소비된다. 바람은 잡히지 않는다. 그림자도 쥘 수 없다. 허상을 좇는 대신 손끝에 닿는 작은 진실 하나라도 붙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포풍착영’의 늪에 빠지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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