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의 경제가 답이다] 청년 일자리 확대 쇼라도 하라

··박원재 논설고문
[박원재 논설고문]


대학 4학년 2학기 재학생이 취업에 성공하면 학교마다 정한 절차에 따라 수업을 듣지 않아도 출석을 인정해준다. 2016년 교육부가 마련한 ‘조기취업 대학생 학점부여 조치’에 따른 특례 규정이다. 대학 졸업자들의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취업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하나라도 줄이자는 취지로 도입했다.
전례 없는 취업 한파에도 졸업반 학생이 조기취업으로 마지막 학기 출석을 인정받는 사례는 강의실마다 꽤 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일자리를 구한 조기취업은 축하받아 마땅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기업이 요구하는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눈높이를 낮춰 임금과 복지 수준이 떨어지는 일자리를 받아들인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경력을 쌓은 뒤 ‘이직 사다리’를 타고 좀 더 좋은 조건의 기업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이지만 사다리에 올라탈 기회가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중소기업·비정규직과 대기업·정규직 간의 임금 및 고용 안정성 격차가 상당하고 칸막이까지 견고한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자신의 노동 신분이 고착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기업들에 특별한 요청을 드릴까 한다. 예전엔 좋은 자원을 뽑아서 교육하고 훈련했는데 요즘은 경력직만 뽑는다. 가혹한 측면이 있다”며 신규채용 확대를 당부했다.
이 대통령의 당부 2일 뒤 삼성 SK 현대차 LG 등 7개 주요 그룹은 일제히 신규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이 앞으로 5년 동안 6만명의 신입사원을 뽑겠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기업들이 내놓은 올해 신규채용 규모는 4만여 명으로 당초 계획보다 4000명가량 늘었다. 정권 출범 첫해에 정부가 고용확대를 강조하면 기업들이 화답하는 방식의 ‘채용 이벤트’와 비슷하게 닮아있다.
일자리가 부족해 좌절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겐 가뭄 속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신입보다 경력을 선호하는 기업들의 채용 트렌드가 이번 이벤트로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한번 뽑으면 나중에 내보내기 어려우니 최대한 검증된 인력을 뽑는다는 경력 채용 현상은 과도한 정규직 보호로 상징되는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초래한 것이다. 일단 그 시장에 진입한 세대는 기득권을 누리지만 거기에 끼지 못한 후발 다수 청년들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역대 정부 중 고용 문제에 대해 가장 진심을 보인 때는 문재인 정부였다. 대통령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했다. 공공기관에 청년인턴제를 독려하면서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고용주로 나섰다.
그러나 일자리는 임기 내내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정부가 만들어 낸 단기 일자리, 공공 일자리는 고용 통계 수치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전체적인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발표했다가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공시족(族)’들의 강한 반발에 부닥치기도 했다.
일자리는 대통령의 의지와 정부의 선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일자리 창출 주체는 기업이며, 정부의 역할은 일자리를 늘리기에 유리한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도 확인시켰다.
이재명 정부에서 일자리, 특히 청년고용은 핵심 어젠다의 위치에서 비켜 있다. 재정지출 확대, 노사관계 재정립, 기업 투명성 강화 등을 밀어붙이는 동안 일자리는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이다.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장관으로 맞은 고용노동부는 이달 들어 약칭을 15년간 써온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꿨다. ‘노동부’는 고용을 소홀히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약칭의 변경은 단순히 명칭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의 내용과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고용부’ 시절엔 고위직 관료일수록 실업률과 취업률을 연령별 산업별 고용 형태별로 챙기고 머리에 입력했다. 눈치 빠른 공무원들은 이제 새 정부에서 각광받는 정책이 고용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먼저 체득하고 그럴싸한 정책 아이디어로 실증한다.
김영훈 장관은 “고용되지 않은 일하는 시민, 사용자 없는 노동자, 임금 비임금 노동자, 자영업자 등 노동의 가치를 광범위하게 보호하겠다”고 했는데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청년은 여기에서 빠져있다.
기업들이 신입과 경력 채용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청년 신규채용을 늘릴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는 중점정책 목록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새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에서 역대 정부의 단골 메뉴였던 노동개혁은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를 노동존중과 노동권 강화가 차지했다.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 주 4.5일 근무제, 근로자 정년연장 등 일자리 장벽으로 작용할 소지가 많은 정책들이 대기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노동권 강화는 고용의 관점에서 보면 일자리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자리를 줄일 위험이 큰 정책이다. 국회를 통과해 시행을 앞두고 있는 노란봉투법은 기업과 노조가 이해당사자인 법처럼 보이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청년 일자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용 관련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에서 노란봉투법에 대해 청년층의 47%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답해 전 연령층 중에서 우려가 가장 높았다. 노조의 파업권 강화가 기업들의 투자와 채용 의지를 꺾어 일자리 문턱을 더 높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주 4.5일제와 정년연장도 개별 정책만 놓고 보면 사회적 필요성을 주장할 근거가 있는 제도지만 노동권 강화와 청년고용 확대라는 상반된 가치 속에서 숙고와 숙의를 통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문제다. 노란봉투법으로 인한 채용 리스크 증가, 주 4.5일제에 따른 인건비 부담 증가, 정년연장으로 인한 직접적 일자리 대체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경기침체와 수익 악화로 고전하는 기업들의 채용 의지를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약자는 힘이 더 세진 노조의 보호를 받고 정년이 보장된 근로자가 아니라 일자리를 잡아본 경험이 없고 조직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취업준비생 또는 청년 실업자다. 노조는 표를 무기로 국회의 입법과 정부의 정책 입안 과정에 자신들의 요구를 반영할 다양한 통로를 갖고 있지만 조직이 없고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의 비고용 청년들은 배제돼 있다.
이미 산업 현장에서 자리를 잡은 기존 노조원을 보호하는 노동규제가 사회 진출을 앞둔 청년층의 기회를 줄이는 역설을 낳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신입 기피, 경력 선호’ 현상의 책임을 기업에만 돌리는 건 옳지 않다.
현재 일자리 사정은 대규모 실직자를 양산한 1998년 외환위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빠졌고, 특히 청년 고용은 최악의 상황이다. 고용창출 효과가 큰 제조업과 건설업, 도소매업 등에서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구직자 1명당 일자리 개수는 0.44로 일자리 하나를 두고 두명 이상이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다. 청년층(15∼29세) 일자리는 8월에만 21만9000개가 사라졌고 청년 고용률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장인 16개월 연속 하락세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땀흘려 일해야 할 청년 고용률이 45%로 은퇴 연령인 60세 이상(48%)보다 낮은 기현상이 6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구직 자체를 포기하고 ‘그냥 쉰다’는 청년이 44만명을 넘은 것은 청년 일자리가 질과 양 모두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발 관세협박 대응을 위한 공장 해외 이전과 석유화학 철강 등 산업 구조조정 여파로 제조업 일자리는 감소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단순업무 대체로 그나마 남아있는 양질의 청년 일자리조차 고갈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모든 나라, 모든 정권의 최우선 관심사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협박과 투자압박도 자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다.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난 지금 ‘일자리 우선’의 국정 기조가 복원돼야 한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작업과 기업의 채용을 막는 경직된 고용환경을 개선하는 과제는 선후 구분 없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최선의 복지이고 최고의 경제정책이다. 일자리가 늘어나서 생기는 내수 회복 효과는 재정에 부담을 주는 일회성 소비쿠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지속적이다.
청년에게 일할 기회를 주지 못하는 나라, 일자리를 구할 의욕을 잃고 그냥 쉬는 청년이 많은 나라, 청년의 활기가 사라지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대통령 집무실에 청년고용 상황판을 들여놓는 쇼라도 보고 싶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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