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낯선 팬서비스, 친절한 입문서…'전지적 독자 시점'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팬덤을 거느린 작품을 원작으로 둔다는 건 창작자에게 행운이자 숙명이다. 대중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이야기다. 더욱이 텍스트와 영상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흐른다. 텍스트는 인물의 내면을 A4 두 장 분량으로 펼칠 수 있지만, 영화는 그 감정을 한 줄 대사와 몇 초의 시선으로 압축해야 한다.

그래서 원작을 영상화한다는 건, 충돌을 각오한 채 뛰어드는 일이다. 원작 팬덤의 기억과 상상을 잠시 뒤로하고, 새로운 관객 앞에 이야기의 얼굴을 다시 내보여야한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그 간극을 메우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영화라는 매체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원작을 통째로 복기하기 보다 영화적 쾌감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거대한 파노라마 대신 능선 하나가 또렷하게 솟는다. 선택과 집중은 속도감을 확보했고, 서사는 군더더기 없이 굴러간다. 이 리뷰는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으로서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작가님, 이 소설은 최악입니다."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유일한 독자였던 평범한 직장인 김독자(안효섭 분)는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소설 속 세계로 바뀌는 기이한 사건을 겪는다. 괴수가 나타나고 도시가 무너지는 와중에, 이 결말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김독자는 주인공 유중혁(이민호 분), 동료들과 함께 소설의 정해진 결말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김병우 감독은 방대한 원작의 '산맥'을 한 편의 '봉우리'로 압축해냈다. '김독자가 동료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다'는 단일 서사 축에 집중해 속도감 있는 진행을 펼친다. 김독자의 여정을 따라가는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리듬을 얻고, 이야기는 단단한 집중력으로 몰입을 끌어낸다. "전지적 관객 시점"을 위한 각색은 러닝타임 내내 유효하다.

또 김 감독은 설정 설명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베팅한다. '시나리오 창'과 '코인', '튜토리얼' 같은 게임 구조의 장치는 설명보다 체험으로 주어진다. 세계관은 UI처럼 화면 위로 튀어오르고, 배우들의 리액션이 곧 규칙의 해설이 된다. 덕분에 원작을 모르는 관객조차 낯선 설정을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 영화는 그렇게 확보한 여백을 '독자'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에 쏟는다. 피할 수 없는 괴수의 습격, 끊어진 다리 위에서 마주한 두려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더 이상 그는 소설의 구경꾼이 아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고 싸우는 사람이 된다.

카메라는 이 결심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판타지의 설정은 스펙터클을 책임지고, 인물의 땀과 시선은 현실감을 부여한다. 원작 팬들에게 익숙한 개념인 '배후성'이나 '성좌'는 서사 중심에서 비껴나지만, 그 생략은 인물의 감정에 더 많은 호흡을 허락한다. 과감한 삭제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리한 정리로 읽힌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시각적으로도 오랜만에 만나는 여름 블록버스터의 쾌감을 안긴다. 소설 속 상상이 스크린 위로 실감 나게 펼쳐지고, 특히 지하철 역사에서 벌어지는 괴수와의 전투는 공간감과 밀도 면에서 압도적이다. 금호역·충무로역·충정로역 등 공간은 시나리오의 전개에 따라 점차 전장으로 변모하고, 실제 마감재를 사용한 세트와 정밀한 VFX 협업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허문다. 90도로 회전하는 짐벌, 탈착 가능한 지하철 내부, 특정 구역에만 조명이 들어오는 '그린존' 같은 설정은 디테일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어룡의 뱃속을 표현한 탄성 세트는 배우의 움직임과 카메라 앵글까지 고려해 제작돼, 스크린 위에서 현실감 있게 작동한다.

익숙한 RPG 게임 퀘스트 구조와 이세계물 애니메이션의 문법은 낯설지 않게 사용된다. 오히려 관객이 서사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내러티브 튜토리얼처럼 작동한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도 과하지 않고, 장르 팬에게는 반가운 장치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2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의 활약도 인상 깊다. 안효섭은 김독자의 감정 곡선을 단단하게 완성하며 영화의 중심을 책임진다. 세계가 무너지는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과 감정의 밀도는, 관객이 인물의 여정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정희원 역의 나나는 단연 눈에 띈다. 액션의 쾌감과 감정의 결을 모두 끌어올린 그는, 클라이맥스를 장악하며 인물의 서사와 정의감이 만나는 지점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낸다. 이민호는 그의 명성에 맞게 무게감 있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채수빈과 신승호는 다양한 감정과 긴장감을 유연하게 연결한다. 아역배우 권은성은 '전지적 독자 시점'의 킥. '길영'의 깜찍함은 영화의 숨통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러닝타임의 제한 속에서 이야기를 빠르게 밀고 나가다 보니, 다채로운 캐릭터와 설정들이 충분히 소개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생긴다. 원작 팬에게는 디테일의 생략이 아쉽고,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인물 간의 서사나 설정이 궁금증으로 남을 수 있다. 또 '이지혜' 역의 배우 지수는 미숙한 연기력과 부족한 발성도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원작에서도 강한 팬덤을 보유한 인물임에도, 영화에서는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듯하다. 보는 내내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방향이 아쉬움으로 기억되는 쪽이라면,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원작 팬들에게는 충분히 다가오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차이가 오히려 작품의 선택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은 분명하다. 비록 사랑했던 장면이나 디테일이 빠져 있더라도, 이야기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인지해주길 바란다. 원작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조금 다른 결의 '팬서비스'로, 처음 이 세계를 접하는 관객에게는 충분히 친절한 입문서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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