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⑩]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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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8-1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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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의 망명생활 중 가족을 그리며

[윤봉길 의사 동상]


1930년대의 시대상황은 일제의 침략이 만주로, 대륙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확대되어 가고, 마침내는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에 일제는 군비(軍備) 확충을 위해 우리 조선민족에 대해서 착취와 수탈, 탄압의 광기(狂氣)가 한층 더 가중되었다. 1930년 4월초,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한 청년이 가슴에 조국광복의 웅지(雄志)를 품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가 바로 대한의 남아 청년 의사 매헌 윤봉길이다. 조국독립운동의 발원지 만주는 또 한 사람의 청년 지사 매헌을 받아들였다.

만주, 大志 결행을 위한 모색의 시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땅 만주는 매헌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보자 매헌은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 농촌부흥운동에만 매진해 온 매헌에게 있어 만주는 황금의 땅으로 부럽기 짝이 없었다. 
삼엄한 국경경비를 뚫고 마침내 만주땅을 밟은 매헌과 이흑룡, 정주여관에서의 인연으로 함께 온 김태식과 한일진 일행 4명은 감회가 새로웠다. 일단 이들은 이곳 사정에 밝은 김태식을 필두로 독립군 근거지로 발길을 옮겼다. 긴 여정 끝에 독립군숙영지(宿營地)에 도착하자, 김태식이 책임자에게 신분을 밝힌 뒤 이곳에 머물기를 요청했다. 책임자는 무척 반가워하며, 나름 대접에 소홀치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독(旅毒)을 푼 뒤, 숙영지를 둘러본 매헌은 크게 실망했다. 매헌의 애초 생각은 임시정부를 찾아본 다음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다.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의 혁혁한 전과(戰果)를 익히 들어온지라, 독립군이 되어 직접 총을 들고 일제 타도를 위해 한몸을 불사르고자 했다.
그런데 현장에 와서 보니 회의(懷疑)가 들었다. 경계태세는 물론 엉성한 지휘체계 등이 한눈에도 느껴졌다. ‘숙영지의 크고 작음을 떠나, 이렇듯 체계가 없고 열악한 상태로 어찌 적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암담했다.
매헌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이흑룡과 많은 생각을 나눴다. 결국 이곳에서 대한독립군 소속 김태식과 헤어진 나머지 일행은 숙영지를 나와 길림(吉林) 등 만주지역을 둘러보며,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로 했다.
매헌, 이흑룡, 한일진은 계획한 대로 만주 독립군 근거지를 찾아다니는 한편, 조선인이 모여 사는 촌락에 들러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밤에는 우리 동포들에게 강연회를 통해 어려운 국내 사정을 알리며, 틈틈이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이렇듯 매헌은 어디서든 애국정신을 전파하는 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이며, 뜻한 바를 이룰 모색의 시간을 가졌다.
이흑룡은 매헌에게 양세봉 장군이 최고책임자로 있는 조선혁명군 사령부에 머물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매헌의 생각은 달랐다. 당초 결심대로 임시정부에 가서 상황을 살펴본 뒤, 확실한 진로를 정하고 싶어 이흑룡의 권유를 정중히 사양했다. 약 1개월간 유랑 생활을 마친 일행은 안동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흑룡은 본연의 임무수행을 위해 국내로 들어가고, 매헌과 한일진은 상해로 가기 위한 기착지 청도로 향했다.
 

[중국 청도 광서로]

청도에서의 생활
매헌은 안동에서 기선(汽船) 광리환(廣利丸)을 타고 한일진과 함께 청도에 도착했다. 고향 목바리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2개월쯤 된 1930년 4월말이 되었다.
매헌은 우선 민족주의자 강석규(姜錫圭) 집에 잠시 머물며 직업을 찾아 시내로 나섰다. 강석규는 청도에서 음식점 송죽당(松竹堂)을 운영했다. 며칠 후 강석규의 소개로 봉천로(奉天路)에 있는 일본인 나카하라 겐자로(中原兼次郞)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취직이 되었다.
청도 도착 6개월이 지난 11월초, 선교사 계통의 학교에 다녀 영어에 능통한 한일진은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만주에서 크게 실망한 한일진은 미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애국지사를 도우며 독립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매헌은 그의 뜻을 존중해 주며,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 모두를 여비에 보태라고 쥐어 주었다.
훗날 매헌이 상해의거를 결행하고 순국한 그해 말, 미국 켄터키에서 시량리 윤 의사 집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발송인은 한일진이었다. 청도를 떠날 때, 윤 의사가 보태준 여비를 이제야 조금이라도 갚게 되었다는 내용의 글과 함께 25불의 돈을 보내왔다. 당시 미화 25불은 거금이었다. 한일진은 매헌의 은혜를 잊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께 편지를 쓰다
한편 매헌은 1930년 10월 10일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집을 떠나온 지 어머니께 두 번째 보내는 편지로, 지난 번 어머니의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왕사를 회고하니 새삼스럽게 세월이 빠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하서(下書)를 봉독하오니 구구절절에 훈계하신 말씀에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뼈끝까지 아르르하여지며 인정 없는 이놈의 눈에서도 때아닌 낙숫물이 뚝뚝뚝, 그러고는 잠잠히 앉아 경과사(經過事)를 되풀이하여 봅니다.…(중략)…
두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항상 혼자 부르짖기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이상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자이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목적의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중략)…”


매헌은 편지로나마 ‘자신의 결심이 결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머니께 강조했다. 청년 의사 매헌이 불의(不義)에 항거하며, 타오르는 불길처럼 맹렬한 25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이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마음의 빚, 월진회비 송금하다
매헌은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목바리에서 야학을 이끌던 실력은 만주에 이어 청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매헌이 굳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취직을 한 것은 비교적 월급이 다른 곳에 비해 후하고,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에 대비해 일본어회화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집에서 나올 때 가져온 월진회 공금 60원은 매헌에게 있어 늘 마음에 빚이었다. 청도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 결국 월진회 공금을 송금했다. 매헌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청도에서 아들 종(淙, 모순)에게 보내는 편지 (1931)]

아들 종(淙)에게 보낸 편지
그즈음 아내가 둘째아들을 낳았다. 매헌은 아들의 이름을 담(尹淡)이라 지어 보냈다. 매헌은 큰아들 종(淙)이 ‘아버지가 곁에 있는 아이들을 부러워한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보곤 아들 생각에 잠을 못 이룬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태어난 담을 생각하니, 어린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단 생각에 괴로웠다. 큰아들 종에게 편지를 썼다.

“종아! 재롱 많이 하고 사랑 많이 받아라. 네가 정말 두순에게 대하여 너는 아버지가 있으니 좋겠다고 하였니?…(중략)…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못 되는 것은 현재의 자유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바이다. 종아! 너는 아비가 없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 아비가 이상(理想)의 열매를 따기 위해서 잠시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지, 영원히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다. 너에게는… 눈물이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훈련시키고 교양을 쌓아 줄 어머니가 있지 않느냐.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사람을 보건대, 서양에는 영웅 나폴레옹과 발명가 에디슨, 동양에는 맹자가 있단다. 나중에 따뜻한 악수와 키스로 만나자.”

매헌은 아직 글도 떼지 못한 자식에게 쓴 편지에서 진한 부정(父情)과 강한 아들이 되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이렇듯 매헌의 자식 사랑은 이 세상 여느 아버지에 못지않았다. 한편,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소중한 존재로서의 어머니를 상기시키면서 맹자, 나폴레옹, 에디슨 같은 위인을 거명했다. 특히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쓴 대목에선 매헌의 인류애와 철학, 사고(思考)가 나이에 비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尺度)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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