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혁 칼럼니스트]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천하를 분점한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진나라와 국경을 접한 모든 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훗날 진시황의 천하통일 기초를 닦은 당대 최고의 명장이다. 기원전 281년 백기가 위나라의 도읍 대량(大梁)을 공격하려 하자 세객 소려(蘇厲)가 주나라 천자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대량이 함락되면 주나라도 위험해질 겁니다. 그러니 양유기(養由基)의 고사를 들어 백기의 출전을 만류하도록 하십시오."
소려가 언급한 양유기의 고사는 이러하다.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양유기는 백 보 밖의 버드나무 잎을 다 쏘아 맞춰 '백발백중'이란 성어를 낳은 명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솜씨에 감탄했지만,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이 아무리 버드나무 잎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더라도 적절히 쉬지 않으면 이윽고 기력이 떨어져 활이 비뚤어지고 화살이 휘어질 것이오. 그리하여 단 한 발이라도 빗나가면 앞서 쌓은 성과가 모두 허사가 될 것이오(夫射柳葉者, 百發百中, 而不已善息, 少焉氣力倦, 弓撥矢鉤, 一發不中, 前功盡矣)."
지금까지 쌓은 전공이 아무리 많더라도 대량 공략에 실패하면 그동안의 성취가 빛을 잃을 수 있음을 양유기의 고사를 들어 경고하고 설득하라는 의미다. 주 천자는 소려의 책략을 받아들여 백기에게 사신을 보내 이 말을 전했고, 단 한 번의 실책으로 공든 탑이 무너질 것을 경계한 백기는 결국 병을 핑계로 군대를 돌렸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실력을 갈고 닦아 남다른 성과를 내고 주변의 인정을 받으면서 비로소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명성을 얻기는 힘들어도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최근 추미애 경기도지사와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새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걸어온 길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불거진 언행과 처신을 둘러싼 논란에 민심은 요동쳤고 두 사람이 평생 쌓아 온 명성은 뿌리째 흔들렸다.
6선에 당 대표, 장관을 역임하며 다소 거칠지만 단호한 언변과 투쟁력으로 강성지지층을 확보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 온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국정감사 답변 중 소방을 '재정 빨대'에 비유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른바 '소방 빨대' 실언이다.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했지만 중앙정부와 대통령이 생색만 내고 돈은 여전히 지방정부가 내는 구조가 문제라는 야당 의원의 발언에 맞장구를 친 추 지사의 문제 의식 자체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럼에도 그걸 하필 '빨대'라는 정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입 밖에 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정치 인생에 큰 위기를 만난 건 평소의 거친 말버릇이 불러온 설화다. '구시화문', 즉 입이 화근이라는 옛말 그대로다. 사과에 인색한 성정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박자 늦은 사과를 하면서도 "사과를 바라시니까 사과드린다"는 말을 덧붙여 진정성 논란을 키우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오랜 정치 역정에서 쓴 맛 단 맛 다 보며 멘탈은 강철이 됐을지언정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은 퇴화된 것 아니냐는 정치권 분석이 나왔을 정도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말버릇 얘기가 나온 김에 부언하자면, 부승찬 민주당 의원이 제 딴에는 추미애 지사를 역성든다고 국정감사 도중 "소방이 재정을 쭉쭉 빨아먹는다"는 돌출 발언을 하여 빈축을 산 것이나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술자리 욕설 녹취 폭로로 이미지에 타격을 받은 것이나 모두 평소에 하던 거친 언어 습관의 응보일 것이다. "정치는 우리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상대방이 자빠진다”고 한 YS의 말은 정치 9단의 통찰에서 우러난 명언이다. 검찰개혁을 두고 기세등등하게 대통령을 몰아붙이던 추미애 경기지사가 마치 자살골 같은 소방 빨대 발언으로 코너에 몰렸다. 공격은커녕 자신의 정치적 안위부터 걱정해야 하니 YS가 남긴 어록 그대로다. 조갑제씨 말마따나 이 대통령은 '하늘이 낸 사람'인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소방노조가 추 지사 대면 후 사과를 수용하기로 했다. 징계를 하던가 출당시키라는 당 안팎의 요구와 추 지사를 옹호하는 친청계와의 계파 갈등 사이에서 좌고우면하던 민주당 지도부도 '경고'라는 솜방망이 징계에 그쳤다.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 국면에 들어서자 추 지사가 정책토론회를 열고 지방세제 개편을 요구하는 등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지만, 사과의 기본도 모르는 막말 정치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추 지사의 앞길에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추 지사가 큰 꿈을 이루려면 사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게 과연 배워야 알게 되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자신의 소장품을 셀프 추천하여 전시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또 어떤가. 유홍준 관장은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 등 다수의 저술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넓혀 인기와 명망을 얻고 오랜 세월 문화권력으로 군림했다. 그런 그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 자신의 소장품인 친일파 박중양의 유묵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다)을 셀프 출품한 게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반시국은'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인 영규 대사가 한 말로 전해진다. 유 관장은 자신이 소장자라는 것도 한동안 숨긴데다가 유묵을 애국지사 박원근의 글씨로 잘못 알고 있었다. 학계에서 이전부터 지적해 온, 사실 확인과 고증에 꼼꼼하지 않은 학문적 태도와 서술 방식의 폐해가 발목을 잡은 셈이다.
유 관장은 지난달 19일 국정감사에서 자신의 거취를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이틀 뒤 결국 사퇴했다. 도덕성과 전문성이 동시에 타격을 입은데다가 국중박의 위상도 추락시켰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유 관장은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부부 동반 외유성 유럽 출장으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청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데 이어 18년 만에 다시 불명예 퇴진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사회 명망가이자 지식인의 도덕적 해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씁쓸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멈출 때 멈추지 못한 욕심이 눈을 가렸나 보다.
양유기의 고사를 듣고 말머리를 돌린 백기는 끝내 전공진기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조나라 정벌을 놓고 자신의 군사적 판단에 대한 확신과 왕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다가 파멸을 맞았다. 왕의 분노를 사 유배를 가야 했고 자결하라는 왕명에 의해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백발백중의 명궁이라도 모든 화살을 다 맞힐 수는 없다. 무적의 상승 장군도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명성이 높아지고 공적이 쌓일수록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스스로 멈출 줄 아는 '지지(知止)'의 지혜를 잊은 자만과 방심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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