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 이는 백기완 선생과 장준하 선생 등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헌 요구를 담아 주도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가담한 이들은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형사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2년 8월부터 2023년 1월까지 긴급조치에 대한 종전 판례를 바꿔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백기완 선생 유족을 포함한 긴급조치 피해자 가족은 이달 초 국가배상 청구 소송의 민사 재심을 청구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진 군사 독재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이들과 유족 중에서는 아직도 국가폭력의 피해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개봉한 '암살자(들)'이란 영화가 이번 주 누적 관객 300만명을 돌파했다. 문화계에서는 축하받아야 할 만한 일이나 정치권에서는 논란과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1974년 박 전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일부 인물이 당시 한·일 외교 관계 등을 근거로 중앙정보부 '윗선'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장면이 포함되면서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라는 의문이 이 영화 흥행에 상당 부분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
당연히 영화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우선이어야겠지만 이 글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둔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생각은 없다. 어느 영화라도 평가할 재간이 없을뿐더러 개인적인 영화의 성향이 '암살자(들)' 감독의 그것과 맞지 않다. 그동안 연출한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장르라는 이유로 발동하는 호기심만으로는 영화관까지 갈 요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훗날 안방에서 볼 의향 정도는 있다.
어떤 연유로든 상업용 영화이기에 더 많은 관객이 찾을수록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관을 찾는 이가 점차 줄어드는 최근 상황에서 흥행작이 등장한 사실만큼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영화를 보지 않고서도 "패륜적"이라며 의미 없는 논쟁에 끌어들이려는 발언이, 국제영화제 측에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어이없는 행위가 오히려 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하게 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고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투자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에 대한 비판을 넘어 특정 배우를 비하하거나 심지어는 그의 집 앞에서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광경을 보면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국가폭력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정치인이나 극우 단체를 향해서는 "영화에서 싫고 불편한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의 일침을 전해주고 싶을 정도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3기 출범을 계기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국가를 대표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과거사 정리라는 해묵은 숙제를 더는 다음 세대에 떠넘길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는 영화로만 봐야 한다. 하지만 '암살자(들)'이란 영화의 배경은 그 당시의 의문을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여전히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영화를 잘 만들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평가하는 것을 떠나 영화 때문에 비로소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시대의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