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스카이라인 뒤로 거대한 누르 알렘 구체를 뒤로 고려인 3세 엘레나 고(55)은 거침없이 대답한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카자흐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고씨는 한국의 전통을 지키며 현지 고려인 사회와 가까이 지낸다. 서울에도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
하지만 고씨의 삶이 만들어진 곳은 카자흐스탄이다.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가족을 꾸리고 두 딸을 키웠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고씨에게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조상들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소련 극동 지역에 살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첩보 활동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당시 소련 정부가 내세운 이유였다.
수만 가구가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사람들은 열차에 실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땅으로 보내졌다.
고씨 가족의 카자흐스탄 생활도 그렇게 시작됐다.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 도착했던 그들”
소련 기록에 따르면 1937년 10월 25일까지 한인 3만6442가구, 17만1781명이 124대의 열차를 타고 소련 극동을 떠났다.
이 가운데 9만5256명은 카자흐스탄, 7만6525명은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이후 기록상 카자흐스탄에 실제 정착한 한인은 9만5427명이었다.
하지만 고씨에게 강제이주의 역사는 숫자보다 가족에게 전해 내려온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강제로 이주하였던 가족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탁 트인 초원에 도착했다고 했어요.”
오랜 열차 이동 끝에 도착했지만 제대로 된 정착지는 없었다. 낯선 초원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것은 어떻게 살아남느냐는 문제였다.
고씨가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는 강제이주의 고통과 함께 또 하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카자흐 사람들이었다.
당시 현지 주민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받아주고 먹을 것을 나눴다고 한다. 그들 역시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카자흐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때 그 친절함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소련이라는 국가는 이들에게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강제로 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주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이후의 삶은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갔다.
일을 하고 집을 꾸렸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학교에 갔다.
첫 세대에게 카자흐스탄은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보내진 곳이었다.
다음 세대에게는 태어난 곳이 됐다. 그다음 세대에게는 학교를 다니고 일하고 가족을 만드는 곳이 됐다.
강제로 보내진 땅은 그렇게 살아가는 곳이 됐다.
고씨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고향이 됐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이 불러온 변화
약 90년이 흐르는 동안 고려인 사회도 크게 달라졌다.
카자흐스탄의 2021년 인구조사에서 고려인은 11만8450명으로 집계됐다. 2009년보다 약 18% 늘어난 규모로 전체 인구의 약 0.6%를 차지한다.
고려인 공동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모습은 강제이주 초기와 크게 달라졌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도시화다.
2021년 기준 고려인의 약 87%가 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한때 농업 정착촌과 소련 집단농장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공동체가 이제는 대부분 도시에서 생활한다.
언어에서도 세대 변화가 드러난다.
인구조사에서 고려인의 41.6%가 자신의 민족 언어를 모어라고 답했다. 이 수치는 한국어 구사 능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언어를 자신의 모어로 인식하는지를 묻는 항목이었다.
고려인이라는 민족적 뿌리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더 이상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별도 인구조사 항목에서는 고려인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적어도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정말 다릅니다.”
고씨에게 ‘다르다’는 말은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고씨 가족은 지금도 한국의 전통을 지킨다. 현지 고려인 단체들도 축제와 문화 프로그램을 열고 한국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음식에도 고려인들이 지나온 시간이 남아 있다.
1937년 중앙아시아에 처음 도착한 한인들은 이전에 먹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기 어려웠다. 소련 극동에서 사용하던 식재료를 카자흐스탄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국 음식을 만들 식재료가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구하기 힘들었죠. 그렇기에 저희는 카자흐스탄에 이미 있던 재료를 사용해야 했죠.”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현지의 생활 방식에도 익숙해졌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는 한국 식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고려인 음식은 이미 오랜 시간을 지나며 달라진 뒤였다.
그 변화가 곧 사라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인 문화는 낯선 환경과 섞이면서도 이어졌다.
살아남으면서 달라졌고, 달라지면서도 고려인으로 남았다.
▲“카자흐스탄의 일부라는 것이 행복합니다”
고씨 한 사람의 경험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고려인이라도 태어난 국가와 세대에 따라 정체성과 사회에 대한 소속감은 다르게 나타난다.
고려대 사회학자 윤인진 교수가 2024년 발표한 연구는 2022년 10개국 성인 재외동포 26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분석했다. 이 가운데 카자흐스탄 응답자는 186명, 우즈베키스탄은 234명이었다.
연구에서는 세대와 거주 국가에 따라 사회통합 정도에 차이가 나타났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1세대 고려인은 사회 제도에는 어느 정도 통합돼 있었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보였다.
반면 카자흐스탄의 후속 세대는 여러 영역에서 높은 수준의 사회통합을 나타냈다.
고씨는 자신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처럼 말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닌 곳도 카자흐스탄이고 사업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다. 두 딸도 이 사회에서 자랐다.
“카자흐스탄의 일부라는 것이 행복합니다.”
2026년 국제학술지 ‘내셔널리티스 페이퍼스(Nationalities Papers)’에 발표된 연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연구진은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4000명을 조사했으며 이 가운데 고려인은 160명이었다. 별도로 250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도 진행했다.
고려인 응답자의 53%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시민적 정체성을 더 자주 느낀다고 답했다.
강한 민족적 소속감을 자주 느낀다는 응답은 29%로 조사 대상 집단 가운데 가장 낮았다.
반면 80%는 자신이 카자흐스탄 국민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고씨에게도 한국계라는 뿌리와 카자흐스탄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서울을 찾는다고 해서 카자흐스탄에 대한 소속감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을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한국계라는 뿌리를 지울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라고 느낍니다.”
한국은 조상의 땅이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은 고씨 자신의 삶이 만들어진 곳이다.
조상의 고향과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었다.
▲다시 한국으로 향하지만, 그것이 곧 ‘귀향’은 아니다
89년이 흐른 지금 고려인들의 이동은 다시 방향을 바꾸고 있다.
1937년 소련 극동에서 서쪽의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보내졌던 사람들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이제 반대 방향인 한국으로 향한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국적동포 가운데 카자흐스탄 국적자는 2021년 1만3993명에서 2025년 2만1790명으로 늘었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외국국적동포 역시 같은 기간 3만2216명에서 4만1144명으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한국에 체류하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국적자 전체가 아니라 정부가 외국국적동포로 분류한 사람들을 집계한 것이다.
하지만 89년 사이 이동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1937년 한인들은 자신이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 도착할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스스로 정할 수 없었다.
지금의 후손들은 다르다.
일을 찾아 한국에 오고 공부를 위해 국경을 넘는다.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다른 나라로 향한다.
한국으로 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씨도 1년에 한 번 정도 서울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다.
한국은 자신의 뿌리가 이어져 있는 곳이지만 고씨의 삶이 기다리는 곳은 카자흐스탄이다.
고씨의 두 딸은 더 먼 곳으로 향했다.
큰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다른 딸은 홍콩에서 공부하고 있다.
같은 ‘이동’이라는 말의 의미가 한 가족 안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89년 전 조상들에게 이동은 선택할 수 없는 추방이었다.
지금의 후손들에게 이동은 공부와 일, 더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이 됐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카자흐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89년 전 선택할 수 없이 도착했던 땅은 이제 그 후손이 스스로 돌아오는 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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