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사람들이 여기로 다 다녔어요”
지난 5일 강원 화천군 사내면 화악산 북쪽 자락. 삼일리 토박이 길봉순(64)씨가 수풀 너머를 가리켰다. 눈앞에는 길이 없었다. 잡목과 풀이 들어찼고 오래된 나무가 머리 위를 덮었다. 길씨가 가리키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길씨의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강원도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화전정리사업이 추진됐고, 1970년대 들어 화전민의 정착과 이전·이주를 포함한 화전정리사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삼일리에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일분교 관련 지역 기록에는 이 학교가 1954년 설립인가를 받아 운영되다 1995년 학생 수 감소로 폐교됐으며, 학생 감소의 주요 배경으로 ‘1970년대 화전민 철거’가 언급돼 있다. 토박이의 기억과 기록이 겹치는 지점이다.
길씨를 따라 옛 임도로 들어갔다. 그는 “옛날에는 임도가 아니라 오솔길이었고 사람들이 산나물도 뜯고 약초도 캐러 다녔다”고 말했다. 지금 기자가 걷는 길과 길씨가 기억하는 길은 같은 장소였지만 모습은 달랐다. 사람이 다니던 길에는 풀이 자랐고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나무가 들어섰다.
조금 더 들어가자 자작나무가 나타났다. 일정하게 심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그 사이로 잡목과 풀이 자라 주변 숲과 뒤섞여 있었다. 길씨는 “임도를 따라 양쪽으로 자작나무가 이어지고 그늘도 잘 져 여름에도 시원하다”고 했다.
차량 소리가 사라질 즈음 수풀 너머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경사진 암반을 타고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이 바위를 타고 쭉 내려가요.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수량은 많지 않았고 수풀과 지형 때문에 전체 모습을 한눈에 확인하기 어려웠다. 길씨는 화악산 안쪽에 이 같은 물길이 더 있다고 기억했다. 정확한 위치와 규모, 명칭 등은 별도의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날 취재에서 눈길을 붙잡은 것은 물길 자체보다 길씨가 걸음을 멈출 때마다 꺼내놓은 이야기였다. 그가 기억하는 화악산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발길이 있었다.
길씨는 주민들이 산나물과 약초를 찾아 산을 오갔고 산판 작업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산속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이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 등을 재배했다고 기억했다.
이러한 기억의 시대적 배경에는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화전정리사업이 놓여 있다. 화전정리는 1960년대부터 추진돼 1970년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관련 기록에서도 당시 화전민을 대상으로 현지정착과 이전·이주 등이 추진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삼일분교에 관한 지역 기록 역시 이 시기 화전민 철거를 학생 수 감소의 주요 배경으로 전하고 있어 화전정리가 삼일리 주민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번에 길씨와 함께 걸었던 화악산 북쪽 자락의 어느 지점에 화전민이 거주했는지, 이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동했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는 개별 행정기록은 이번 취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길씨의 설명을 듣고 주변을 다시 바라봤다. 집도 없었다. 밭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뿐이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이 산을 생활공간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씨는 몇 차례 멈춰 사람들이 오갔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손끝을 따라가도 대부분 숲이었다. 길이 사라지는 만큼 기억도 사라지고 있었다.
화악산 북쪽 자락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반드시 새로운 비경만은 아니다. 어디에 오솔길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산에서 무엇을 재배하고 무엇을 채취하며 살아갔는지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도 이곳에 남은 역사다.
옛 지명과 산길, 화전과 산판, 산나물과 약초 채취 같은 산촌 생활사는 건축물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의 구술과 행정자료, 옛 지도 등을 함께 조사한다면 화악산 북쪽 자락의 생활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취재를 마치고 화악터널 방향으로 되돌아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걸었던 산은 다시 평범한 숲처럼 보였다. 하지만 길씨에게 그곳은 단순한 숲이 아니었다. 사람이 걷던 길이 있었고 밭이 있었으며 산에서 먹고살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들의 시간이 있었다.
그 흔적 대부분은 이제 나무와 풀 아래 가려졌다. 길씨가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여기로 다 다녔어요”
길은 거의 사라졌다. 아직 기억하는 사람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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