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좀처럼 따라잡기 힘든 산업군 중 하나다. 미세공정은 설계도가 아니라 실패의 기록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어느 스텝에서 불량이 반복되는지, 어떤 조건에서 수율 곡선이 꺾이는지는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손에 잡힌다. 장비를 사올 수는 있어도 그 장비를 돌리는 조건은 사올 수 없다. 한국 메모리가 30년 동안 지켜온 진입장벽의 실체가 바로 이 축적 시간이다.
그래서 후발주자의 시간표가 갑자기 당겨질 때 그 근본 원인을 기술유출에서 찾곤 한다. 물론 중국의 추격을 유출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국가 보조금과 거대한 내수, 적자를 감당해주는 자본이 함께 작동했기 때문이다. 다만 학습 곡선만 유독 짧아졌다면, 누군가 그 곡선을 건너뛸 자료를 건넸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런 사건은 반복됐다. 삼성전자 18나노 D램 공정 정보를 CXMT에 넘긴 혐의를 받은 전직 부장은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6년 4개월과 벌금 2억원을 선고받았다. SK하이닉스에서 화웨이로 옮기며 공정 자료를 출력한 혐의를 받은 전 직원은 항소심에서 징역 5년과 벌금 3000만원을 받았다.
죄질을 규정하는 기준도 석연치않다. 빼낸 파일의 수, 자료의 시장가치, 유출자가 받은 대가를 기준으로 피해를 계산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파일의 개수가 아니라 좁혀진 기술격차의 시간이다.
산업기술 유출은 회사를 배신한 개인의 이직 분쟁이 아니다. 국가가 수십년간 세금과 인력과 시간을 들여 쌓은 자산을 경쟁국에 옮겨 그 대가를 개인이 챙기는 일이다. 처벌 체계도 그 성격에 맞아야 한다. 양형기준에서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을 독립된 가중 인자로 다루고, 피해액 산정 기준을 유출자가 받은 대가가 아니라 기술을 다시 확보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으로 옮겨야 한다. 범죄수익 몰수·추징이 실제로 집행돼야 '복역 후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 성립하지 않는다. 인력을 중개하는 브로커와 알선 조직에 대한 별도 처벌, 해외 법인과 협력사를 경유하는 우회 유출에 대한 감시도 함께 가야 한다.
기술 유출의 대가는 치명적이다. 이미 범용 D램 시장은 상당 부분 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업체가 DDR4를 반값에 풀고 DDR5까지 양산 단계에 들어선 시장에서, 한국 기업은 점유율 하락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남은 방어선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그 이후의 첨단 AI 반도체다. CXMT조차 HBM에서는 한국 기업과 2~4년 격차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 격차는 자료 몇 건으로 사라질 수 있다. HBM은 D램 코어와 베이스 다이, 적층과 본딩, 열 설계가 맞물린 기술이다. 개별 공정은 짐작할 수 있어도 이를 동시에 잡는 조건은 경험으로만 얻어진다. 커스텀 HBM과 첨단 패키징으로 넘어가는 지금 구간이 유출에 가장 취약하다.
이미 넘어간 기술은 어떤 판결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반도체 초격차는 얼마나 빨리 만드느냐가 아니라, 지금 가진 2~4년을 지켜내느냐에서 갈린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