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의 미술마을 正舌] '지역미술'의 수렁에 빠진 지방미술관 구하기

  • 색이 없는 미술관?

  • 지역작가의 권리가 된 지역미술의 함정

  • 작품수집의 기준은 '행정구역'

컬렉션 수집정책의 관리구조와 절차를 보여주는 프레임워크Frame Work
컬렉션 수집정책의 관리구조와 절차를 보여주는 프레임워크(Frame Work).
 
색이 없는 미술관?
전국 광역·기초자치단체의 미술관 건립 열기는 눈물겹다. 그러나 정작 미술관을 채워야 할 설립목적과 이를 구현할 작품수집정책은 없거나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 짓는 미술관마다 내세우는 표어는 하나같이 ‘예술의 다양한 가치를 공유하고 시민의 삶과 연결하는 열린 미술관’, ‘일상이 예술이 되는 문화교류 허브’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어디에나 붙일 수 있는 이 문구들은 결국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고유색이 없는 그렇고 그런 미술관이 전국에 양산되는 이유다.

실제로 2027년 개관을 목표로 하는 충남도립미술관은 '도민 문화 향유권 증진과 지역민 삶의 질 제고'와 함께, '지역 문화예술의 활성화와 차별화된 문화적 가치 창출'이란 목적을, 2029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인 경북도립미술관은 '전통을 미래로 전하고 세계와 연결된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을 비전으로 내걸었다. 화성시립미술관은 '산업·주거 중심으로 급성장해 온 도시를 예술 기반을 갖춘 글로벌 문화도시로 체질 전환하는, 즉, 시민들이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지역 예술생태계를 아우르는 복합 문화 플랫폼 구축을 지향'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목표를 보면 단어는 다르지만, 그 공통적인 목적은 전통과 세계, 미래와 개방성 그리고 시민들의 문화향유권 신장을 목표로 하며, 지역의 예술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미술관'을 그리다 보니, 정작 미술관이 어떤 시대, 어떤 작가군, 어떤 매체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인지 즉 과녁이 너무 많다 보니 어디를 목표로 조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비단 한두 곳만의 사정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추진 중인 신설 미술관들의 자료를 나란히 놓고 보면, 지역명과 몇몇 상징물만 바꿔 끼우면 그대로 다른 도시에 이식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 닮아있다. ‘열린’, ‘연결’, ‘허브’, ‘일상 속 예술’ 같은 어휘가 거의 예외 없이 반복되는데, 공통된 것은 ‘지역’이다. 

이는 해당 지역의 미술관이 지향하는 특징있는 미술관, 무엇인가 타지역과 다른 자신만의 색채를 지닌 미술관보다는 다른 지역의 미술관과 닮은, 독창적이기보다는 무난한 미술관을 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사적 특수성이나 소장 방향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수사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홍보 담당 부서가 무난하게 시민사회에 설명하고 두루뭉실 합의할 수 있는 최대 공약적 수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두루뭉술한 설립목적과 비전 선언이 개관 이후 수집 정책 부재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무엇을, 왜,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으니, 학예 인력은 매년 예산 소진을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작품을 사들이거나, 행정적으로 편리하고 정치적으로 마찰이 가장 적은 지역 출신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게 된다. 이렇게 목표가 없는 미술관에 정책이 있을리 없고, 정책이 없는 미술관에 고유색이 생겨날 리 없다. 
 
 2026년 개관예정인 아부다비의 구겐하임미술관 모형 이곳도 Owners Representative 방식으로 건립사업을 진행했다
2026년 개관예정인 아부다비의 구겐하임미술관 모형, 이곳도 Owners Representative 방식으로 건립사업을 진행했다.

결국 전국의 신설·기존 미술관들이 저마다 다른 이름을 달고도 서로 구별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왜 이런 미술관이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건축설계도부터 그려 나갔기 때문이다.

대부분 성공적으로 지역의 미술관을 개관한 곳의 경우 건립 초기 단계 즉 공간 프로그램 구성 및 설계 공모 심의부터 큐레이터 출신 전문가를 관장이나 건립추진위원으로 임명해 전권을 부여하고, 최근 외국의 경우는 '문화 기획 및 박물관 컨설팅 펌'을 '전권 위임형 사업주 대리인'으로 선임해 사업의 기획·설계·시공·개관 준비까지 전 과정을 원스톱으로 위임해서 진행하는 방식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면 2017년 개관한 루브르 아부다비, 2026년 완공 예정인 구겐하임 아부다비, 킹 압둘아지즈 세계문화센터 등 대형 프로젝트는 물론 최근에 개관한 중소규모의 문화시설로 태국의 창의디자인센터, 프랑스 니스의 국립 스포츠 박물관, 다퉁 미술관, 알마티 미술관 등이 있다. 다들 이렇게 전문 집단에 일임하는 이유는 이렇게 해야만 ‘보기만 좋은 건물’ 또는 랜드마크가 아닌 “작품이 살고 시민이 향유 할 수 있는 ‘마인드 마크’가 될 진짜 미술관”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의 전통적인 원주민 회화인 아보리지날에 동시성을 접목 동시대미술로 치환한 샐리 가보리Sally Gabori의  파리 카르티에재단미술관 전시전경
호주의 전통적인 원주민 회화인 아보리지날에 동시성을 접목, 동시대미술로 치환한 샐리 가보리(Sally Gabori)의 파리 카르티에재단미술관 전시전경

대개 지역미술관의 밑그림이 잘못 그려지는 것은 박물관학자나 미술관에서 책임있는 큐레이터로 일한 경험 있는 이들을 배제하고, 미술관 설립과 운영과는 거리가 먼 실기 전공의 대학교수나 지역 작가의 의견을 주로 청취하기 때문이다. 미술관 건축 심의에서 집주인이자 사용자를 대표하는 전 현직 경험있는 큐레이터를 배제하고 건축가끼리 모여 심사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작품이 어떻게 수집되고 전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획전시실과 다원 전시실, 아트 스트리트 격의 포이어와 팝업 및 아트큐브 공간 등 박물관학에서는 아직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공간을 건축가가 설계에 반영해 이곳에서 뭘 하라는 것인지 사용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면서 첨단 동시대 미술을 다룰 미술관처럼 포장해 사람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2022년 개관한 중국산시성의 다퉁미술관 Owners Representative 방식을 도입해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Partners가 설계
2022년 개관한 중국산시성의 다퉁미술관, Owner's Representative 방식을 도입해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Partners)가 설계
지역작가의 권리가 된 지역미술의 함정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역의 미술관들이 주 소비자인 지역주민의 뜻과 요구보다는 지역미술인의 주문에 더 귀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사실 미술관은 미술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매개자이다. 그런데 고객보다는 공급자인 미술인들의 요청을 중시한다면 소비자는 외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소비자 중심의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술관 설립을 준비 중인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미술관’ 설립 요구에 따라 그 뜻도 분명하지 않은 지역미술관을 표방한다. 특히 지역미술을 ‘지역주의’로 해석하는 관행 즉 행정구역이 미술사를 대신하는 함정에 빠져 있다. 

‘지역미술’이란 개념은 단순히 특정 지방에 사는 작가가 해당 지역을 그린 풍경화 또는 지역에 사는 작가가 단지 그 지역에서 그렸다는 것으로 정의 될 수 없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비판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전통적으로 지역미술은 특정 지역의 고유한 역사적 맥락, 기후와 지형 등 지리적 특성, 그리고 토착문화 같은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이 예술가의 미학적 시각을 통해 투영된 ‘문화적 산물’을 뜻한다. 하지만 지방자치제 이후에는 행정적 연고와 협회 가입 여부 같은 제도적 기준으로 규정되며 미학적 독창성을 상실했다. 
 
2026 베네치아비엔날레의 바하마 파빌리온 타인의 정원에서 존 비들 라바 먼로 그리고 사후 협업 정신 라바 먼로와 존 비들의 작품 사진 프란체스코 알레그레토
2026 베네치아비엔날레의 바하마 파빌리온, 타인의 정원에서. 존 비들, 라바 먼로, 그리고 (사후) 협업 정신. 라바 먼로와 존 비들의 작품. 사진 프란체스코 알레그레토

결국 현재 우리가 빠져 있는 ‘지방자치제형 지역미술의 함정’에서 탈출하려면 더 이상 출생지, 거주지, 혹은 특정 협회 가입 여부라는 행정적·정치적 기준에서 예술적 맥락과 미학을 바탕으로 전환해, 지역미술이라는 이름의 아무런 지역성도, 동시대성도 보여주지 못하는 하향 평준화 현상을 타개해야 한다.

사실 오늘날의 지역미술은 주소지와 무관하게 특정 장소의 역사, 생태, 산업, 공동체의 기억과 맺는 관계성, 그리고 이를 비평적으로 재해석하는 실천으로 정의된다. 이는 대도시 중심주의와 제도 권력이 은폐한 공간의 서사를 발굴하고, 지역 소멸·기후 위기·이주 문제 같은 글로벌 한 문제의식을 가장 구체적인 현장의 목소리로 증언하는 글로컬 미학으로 진화했다. 이렇듯 오늘날의 진정한 지역미술은 단순한 ‘향토적 재현’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가 사회적 균열과 지역적 상흔을 예술적 언어로 공명시키는 전위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위성이나 SNS 등으로 실시간 전 세계가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에서 물리적 경계, 선 중심의 개념인 지역미술이란 말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지금 동시대 작가들은 글로벌 레지던시와 비엔날레 등 국제적인 무대를 따라 이동하며 작업하는 특정 지역에 귀속되지 않는 유목민적 정체성을 지닌다. 

또한 가장 지역적인 소재가 즉각 세계화되는 글로컬리즘 시대가 도래해 지역과 세계의 이분법적 경계는 지속해서 해체되고 있다. 또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로 유통망이 단일화되면서 전 세계 컬렉터들은 작가의 출신지가 아닌 작품의 예술성만 보고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라바 먼로 아무리 음울하고 칙칙해도 우리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은 남의 마당에서 사는 것보다 이곳에 살고 싶어 한다 고난의 물 위의 다리  2026 아크릴 스프레이 페인트 라텍스 가정용 페인트 에어브러시 혼합 매체 크기 가변적 작가 바하마 파빌리온 사진 라킨 듀리
라바 먼로, 아무리 음울하고 칙칙해도, 우리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은 남의 마당에서 사는 것보다 이곳에 살고 싶어 한다 (고난의 물 위의 다리) , 2026. 아크릴, 스프레이 페인트, 라텍스 가정용 페인트, 에어브러시, 혼합 매체. 크기 가변적. 작가, 바하마 파빌리온, 사진 라킨 듀리

따라서 새로 건립되는 미술관들이 행정구역에 갇힌 지역 안배식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도리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로컬 예술가들을 오히려 ‘지방작가’라는 좁은 틀에 가두어 고립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역미술관은 ‘지역성’을 지리적 한계가 아닌, 세계와 소통하는 ‘독창적인 시선’으로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지방미술관이 지역미술이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오늘날 지역 공립미술관이 표방하는 ‘지역성’이 본질을 잃은 채 표피적인 차별화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자치단체장의 치적 또는 타지역과 문화적인 도시 경쟁을 위해 설립된 미술관은 심도 있는 미술사적 연구 없이 '지역미술 중심의 미술관'이란 정체성부터 선언한 뒤 내용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유령 미술관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싱가포르의 화가 사르카시 사이드Sarkasi Said의 무제 인도네시아의 지역미술인 바틱 회화를 사용해 세계적이며 독창적인 작가로 자리했다
싱가포르의 화가 사르카시 사이드(Sarkasi Said)의 무제, 인도네시아의 지역미술인 바틱 회화를 사용해 세계적이며 독창적인 작가로 자리했다.

또한 국립이나 광역자치단체의 대형종합백화점형 미술관과의 경쟁에서 밀리자 ‘지역’이란 명분을 방어기제 삼아 스스로를 주변화해서 주위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더욱이 개관 이후 예산과 인력의 증가가 거의 고착된 환경에서 ‘지역 작가 지원’은 정치적 면피와 표밭 관리를 위한 손쉬운 명분이 되어 준 때문이다. 특히 지역의 미술인 단체의 반발을 피해 예산을 안배하는 행정 편의주의는 미술관을 ‘그들만의 리그’로 고립시켰다. 

이런 행정 편의주의의 폐해는 시장 왜곡과 예산 낭비로 이어진다. 지자체는 판매액의 수십 배에 달하는 예산을 쏟아부어 자생력 없는 ‘관제 아트페어’를 개최하고, 세금을 들여 서울에 지역 전용 갤러리를 운영하며 지역작가에게 대관료 부담 없이 전시개최를 할 수 있도록 보조 사업을 벌인다. 지역의 공공기관은 환경미화용 미술품 구입마저 거주지로 제한하는 안배식 온정주의에 갇혀 있다. 
 
작품수집의 기준은 ‘행정구역’
조악한 조명이 어지러운 지역 관공서 복도갤러리 전시전경
조악한 조명이 어지러운 지역 관공서 복도갤러리 전시전경

심지어 행정구역 외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제아무리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나고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일지라도 기증조차 거부하는 촌극까지 벌어진다. 필자는 평소 기업이나 개인 컬렉터들의 작품수집과 관련한 컨설팅을 하면서, 소장품의 ‘맥락화’를 위해 또는 컬렉션의 사회적 환원의 한 방안으로 기증을 권한다. 미술품은 본래 인류의 자산이며 공공재인 때문이다. 따라서 평생 애정을 바쳐 모은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영역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사회적 자산으로 환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선의는 현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제아무리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나고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일지라도, 단지 ‘지역출신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기증조차 거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배타적 관행의 뿌리에는 지역 공립미술관들의 뿌리 깊은 ‘행정 편의주의’와 지역을 방패로 삼는 일부 지역작가의 이기심이 배경이 되고 있다. 

 
멕시코의 지역미술과 동시대미술을 결합해 탄생한 오악사카 알리브레헤스Oaxaca Alebrije 하코보와 마리아 앙헬레스 부부Jacobo amp María Ángeles의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 2012 조각된 나무와 아크릴 물감
멕시코의 지역미술과 동시대미술을 결합해 탄생한 오악사카 알리브레헤스(Oaxaca Alebrije), 하코보와 마리아 앙헬레스 부부(Jacobo & María Ángeles)의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 (2012), 조각된 나무와 아크릴 물감

현재 수많은 지방미술관의 기준에 따르면, 작가의 출생지나 거주지가 해당 지자체 관할 안에 있는지만 확인되면 그것으로 ‘지역작가’가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예술적 성취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지역미술’의 반열에 오른다. 반대로 행정구역 밖의 작가라면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이라도 수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예술을 예술 그 자체나 미술사적 맥락으로 바라보지 않고, 주민등록등본상의 주소지로 재단하는 해괴한 혈통주의다.

더 큰 문제는 미술관들조차 자신들이 무엇을 모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지방 미술관은 ‘지역문화 발전’ 같은 뜬구름 잡는 설립 목적과 복잡한 작품수집 심의 절차만 요란하게 내세울 뿐, 정작 미술관의 정체성을 규정할 구체적인 ‘작품수집정책’과 ‘중장기 작품수집계획’은 없거나 매우 형식적이다. 

사실 작품 수집 정책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기관이 예술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취득하고 보존하려는 소장품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기준이다. 이런 기준이 없으니 전문가의 내부적인 검토와 평가를 거친 작품의 기증을 제안하려 해도 어느 미술관에 기증 의사를 타진해야 할지를 일일이 알아보아야 하는 지경이다. 

이렇게 정책의 공백을 지자체의 배타적 애향심과 행정 편의주의가 채우고 있다. 미술관은 지자체의 문화적 자산이자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대승적으로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대중과 공유하는 공공의 공간이다. 질 높은 컬렉션을 무상으로 확보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미술관은 존재 이유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지방자치단체는 이제라도 닫힌 빗장을 풀고, 모호한 규정 대신 명확하고 전문적인 중장기 수집 정책을 전문적인 박물관학과 큐레이팅의 경험을 함께 지닌 이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수립해야 한다. 행정구역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걸작을 외면하는 낙후된 관행을 끝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 지역미술관의 미래는 없다. 

아무런 특징도 없이 오직 지역이란 연고에 의해 규정되는 지역 미술이 예술적,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행정’이 ‘예술’을 참칭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혈연과 지연 중심의 농경 사회적 ‘향토미술’의 껍데기를 과감히 벗겨내고, 전 지구적 위기인 기후, 소멸, 소외, 인종과 성별, 차별, 경제적 불평, 세계화 등 동시대 정치적, 문화적 이슈를 가장 지엽적인 현장에서 목격하고 증언하는 ‘포스트-로컬 미학’으로 무장할 때 비로소 지역미술은 고유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술을 지리적 한계에 가두었던 시작은 일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인의 역사·정치적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의 미술은 '조선만의 고유한 풍토와 정취를 담아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향토색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지역미술은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 식민주의의 산물이자 '문화 쇄국주의'에 다름없는 폐쇄적인 미술정책은 버려야 한다. 이는 도리어 지역 예술가를 ‘지방’이라는 좁은 틀에 고립시키고 미술관을 ‘그들만의 리그’로 몰락시킬 뿐이다. 우리 지역미술관은 다른 지역 작가에게 빗장을 걸어 매면서, 다른 지역이나 더 큰 지역 또는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진출하려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제라도 지역의 틀을 깨고 지역미술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행정구역의 벽을 허물고, 세계와 소통하는 독창적 시선으로서의 진짜 ‘로컬리티’를 구현해야 할 때이다.
 
글에서 나오며 
결론적으로, 오늘날 지역미술관의 가장 큰 위기는 ‘지역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행정 편의주의와 무색무취한 설립 목적에서 비롯된다. 출생지와 거주지라는 협소한 기준에 갇힌 수집 정책은 예술의 본질을 외면하고, 결국 미술관을 스스로를 자신들의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 감금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지역 미술관들은 저마다 ‘작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자처하면서도 정체성도 콘텐츠도 없이 돈과 시간만 소모하는 시설로 전락하고 있다. 본연의 임무인 미술사적 연구와 수집의 논리는 실종되고, 그 자리를 지역 미술인 단체의 요구와 정치적 안전판이 이를 대신 채운다.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시민이다. 생산자인 지역 미술인과 소비자인 시민을 매개해야 할 미술관이, 정작 시민을 배제한 채 공급자의 목소리에만 휘둘리면서 문화적 자산이 아닌 행정적 치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미술관을 짓는 일이 아니라, ‘지역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념과 정책을 세우는 일이다. 명확한 설립 목적과 전문적인 수집 정책 없이 건립되는 미술관은 개관과 동시에 정체성 없는 전시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역미술관은 행정구역의 벽을 허물고, 세계와 소통하는 독창적 시선으로서의 ‘포스트-로컬미학’을 구현해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미술관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작품이 살아 숨 쉬며 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진정한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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