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칸 피단 튀르키예 외교장관이 무너지는 국제 협력 체계를 바로잡고 분열된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과 튀르키예가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단 장관은 4일 서울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제143회 국제정책포럼 기조연설에서 강대국 중심의 낡은 국제 질서가 한계를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그는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 한국과 튀르키예처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역량 있는 중견국들이 전면에 나서 새로운 외교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튀르키예 외교 수장은 오늘날 국제사회가 마주한 구조적 모순을 지적했다. 지난 80년간 전 세계가 수많은 국제기구와 조약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거대한 위기 앞에서는 철저히 분열된 채 공통의 목적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작금의 사태를 단순히 안보 위기로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군사력을 물리적으로 배치하거나 억지력에 기대는 과거의 전술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국제사회의 협력 체계 자체가 무너져 내린 것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짚었다.
최근 걸프 지역에서 이란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무력 충돌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분쟁은 전 세계 경제와 전략적 안정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중재에 나선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과 긴밀히 소통하며 외교 채널을 가동 중이다.
5년째 소모전으로 치닫는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무기력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 국경 근처에서 발생한 중거리 미사일 타격에 대해 피단 장관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확전이라고 비판하며 전쟁이 유럽 전체로 번질 위험을 경고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의 지상 통신망을 겨냥한 중거리 타격을 이어가며 적의 병참을 흔들고 있다.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유럽 지도자들은 향후 평화 협정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서둘러 승인해야 한다는 거센 압박에 직면했다.
특히 가자지구 사태는 붕괴된 국제 질서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외무장관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막지 못한 국제사회의 무능을 심각한 정당성 위기로 규정했다. 인류의 보편적 원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체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기존 체제의 혜택을 누리던 국가들도 이제 자국 문앞에 닥친 위기를 마주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다극화된 세계에서는 어느 한 국가가 전 세계적인 위기를 홀로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역학 관계 속에서 한국과 튀르키예 같은 중견국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그는 분석했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지리적 배경을 지닌 두 나라가 단일 권력 블록의 좁은 이익을 넘어설 때 단단한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논리다.
실질적인 외교 성과를 내기 위해 피단 장관은 각 지역이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낡은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 제도를 철 지난 강대국들의 권력 독점이라고 비판하며, 세계는 5개국보다 크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하칸 피단은 튀르키예 국가정보국 국장으로 13년간 재직한 뒤 지난 2023년 외교장관에 올랐다. 연설의 끝자락에서 피단 장관은 과거 한반도에서 집단 안보의 개념이 시험대에 올랐을 때 한국과 튀르키예가 군사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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