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코스피 8000 시대를 목전에 뒀지만 역설적으로 지배구조 선진화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본궤도에 올랐음에도 일부 기업의 폐쇄적인 경영 방식과 낮은 주주 환원율은 여전히 한국 자본시장의 발목을 잡는 '모래주머니'로 지적된다.
자본시장 최전선에서 기업의 체질 개선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여온 이가 있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대표다. 기자 출신으로 운용사 CEO에 오른 그는 한국형 주주 관여 활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 대표를 최근 만나 행동주의 활동 성과와 트러스톤자산운용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인터뷰 내내 '진정성'과 '자본 효율성'을 강조했다. 이 대표는 "행동주의는 단순히 주가를 띄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자본을 더 생산적인 곳에 쓰도록 유도해 기업과 주주가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근 주주 활동을 벌인 기업 중 태광산업과 KCC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너의 인식 차이'다. 우선 태광산업은 트러스톤자산운용이 가장 개선 여지가 많은 기업으로 지목해온 곳이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재 태광산업 상장 계열사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25배에 불과하다. 태광산업이 0.24배, 대한화섬이 0.18배, 흥국화재가 0.33배다. 자산 가치에 비해 주가가 처참할 정도로 저평가돼 있다는 뜻이다.그런데도 이번 주총에서 회사는 자사주 관련 정관 변경안만 통과시켰을 뿐 주주들이 기대했던 자사주 소각이나 구체적인 가치 제고 계획은 전혀 내놓지 않았다. 특히 이사회의 독립성 문제는 심각하다. 사외이사들이 계열사 간 돌려막기식으로 선임되고 있다. 기존 태광산업 사외이사가 대한화섬으로 가고 대한화섬 인사가 다시 태광산업으로 오는 식이다.
-반면 KCC에 대해서는 '희망'을 봤다고 언급했는데.
"KCC는 세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KCC가 보유한 약 6조8888억원 규모의 삼성물산 지분을 유동화하고 자사주를 소각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KCC는 전체 주식 중 17.24%(153만2300주)에 달하는 자사주 가운데 13.21%(117만4300주)를 2027년 9월까지 분할 소각하기로 결정했다.단순히 수치 때문이 아니라 소통 방식이 긍정적이다. 회사가 우리에게 '지금은 삼성물산 주가가 낮아 팔기 어렵지만 가격이 회복되면 유동화해 주주환원에 쓰겠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우리도 그 논리를 납득하고 양보했다. 결국 기업 변화의 핵심은 제도 변화와 함께 기업 이사회와 오너가 세상의 변화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한국 기업들의 자본 효율성이 낮다는 지적을 꾸준히 해왔다. '자본 재배치'가 왜 시급한가.
"현재 많은 한국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도 이를 투자나 주주 환원에 쓰지 않고 현금이나 부동산으로 쌓아두고 있다. 이것은 독이 된다. 자본(Equity)이 너무 커지면 자기자본이익률(ROE)은 필연적으로 떨어진다. ROE가 낮다는 것은 자본을 생산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시장의 디스카운트로 이어진다.태광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비공식적으로 부동산 가치만 20조원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가총액은 1조원 초반대다. 자산 재평가도 하지 않고 땅만 깔고 앉아 있는 것은 기업 경영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 재배치를 제안한다.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해 고성장 산업에 투자하거나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을 통해 자본 규모를 최적화해야 한다. 이것이 기업 수익성을 높이고 자본시장 전체를 선순환으로 이끄는 생산적 금융의 본질이다. 단순히 '돈을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본을 어디에 배치해야 기업이 더 잘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을 '강성 행동주의'라고 부르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단호하게 선을 긋고 싶다. 우리는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빠져나가는 투기 자본이 아니다. 태광산업이나 BYC처럼 한 기업에 8년 넘게 투자하며 진심 어린 대화를 시도해온 곳이 어떻게 강성인가. 그래서 '행동주의'라는 단어 대신 '주주 관여 활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공개적인 표 대결은 수많은 비공개 대화가 불성실하게 거절당했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기업의 장기적인 동반자로서 거버넌스 개선을 돕는 역할을 지향한다. 또한 최근 주주 활동이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실제 행동주의 전략을 수행하는 펀드 규모는 일본 대비 3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의결권을 확보할 만큼 자금력이 없으면 동력도 약해진다. 결국 리서치 역량을 키워 수익률로 증명하고 펀드 규모를 키워야 진정한 의미의 대중화가 가능할 것이다."
-제도적으로 보완돼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가장 시급한 것은 주총 의장의 독립성 확보라고 본다. 현재는 대부분 대표이사가 주총 의장을 겸임하는데, 이는 선수가 심판을 겸하는 꼴이다. 주총 의장을 주주들이 제안하거나 법원의 승인을 받은 독립적인 인사가 맡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의장의 안건 상정 및 진행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에 대주주로부터 독립시켜야만 공정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또 하나는 '5% 룰'의 유연한 적용이다. 운용사들이 배당 확대 같은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대화하는 것까지 '공동 보유'로 묶어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다. 이사 선임 같은 경영권 사안과 일반적인 주주 권리 행위 안건을 분리해 규제를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 소수 주주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비로소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밸류업이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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