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살목지' 4월 8일 극장 개봉 [사진=쇼박스]
어떤 공간은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시선과 리듬을 바꾸고 어느새 서사의 중심으로 올라선다. 이때 장소는 더 이상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에 그치지 않고,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가는 또 하나의 주체가 된다. 영화 '살목지'도 그러하다. 제목이기도 한 '살목지'는 극 중 인물들의 감각을 이끌고 서사의 결을 빚으며 이야기의 흐름을 붙드는 중심축에 가깝다.
주말 아침, 로드뷰 서비스 업체 온로드미디어의 PD들이 급히 소집된다. 소문이 무성한 저수지 '살목지'의 로드뷰 화면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포착되면서 소란이 벌어져서다. "오늘 안에 반드시 재촬영하라"는 지시를 받은 PD 한수인(김혜윤 분)은 서둘러 촬영팀을 꾸려 현장으로 향한다.
살목지에 도착한 막내 PD 성빈(윤재찬 분)과 '공포탐방' 채널을 운영하는 PD 세정(장다아 분), 촬영 전문업체 대표 경태(김영성 분)와 그의 동생 경준(오동민 분)은 저수지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 속으로 들어선다. 촬영이 시작되자 행방이 묘연했던 선배 교식(김준한 분)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잇따른다. 수인의 전 연인인 기태(이종원 분)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살목지로 향하지만, 현장은 좀처럼 수습되지 않은 채 혼란과 공포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 '살목지' 4월 8일 극장 개봉 [사진=쇼박스]
영화 '살목지'는 저수지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하나의 주체로 완성해낸다. 극 중 살목지는 장치에 머무르지 않고 인물의 감각을 서서히 흐트러뜨리며 시선의 방향까지 바꿔놓는 방식으로 공포를 구체화한다. 실재하는 공간이 지닌 질감과 현실감 위에 인물들의 서사가 겹쳐지면서 영화는 훨씬 물리적인 압박을 획득한다. 익숙한 괴담의 이미지를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실제로 물에 잠기는 듯한 감각으로 변주해낸 점도 인상적이다. 제작진이 공들여 설계한 왕버들 군락지와 기괴하게 솟은 돌탑, 머리카락처럼 얽히고설킨 수초는 저수지라는 장소의 질감을 극대화하고, 미장센은 관객을 서서히 물 아래로 끌어내리는 감각을 만든다. 인물들이 그 안에서 사건을 겪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가 그들을 밀어붙이며 서사를 끌어간다는 점에서 살목지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에 가깝다.
이상민 감독은 이렇게 살아난 공간을 동시대적 체험으로 번역하는 데 능하다.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 모션 디텍터, 고스트 박스 같은 장비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의 기척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감각으로 바꾸는 장치로 기능한다. 자칫 기술적 과시에 머물 수 있는 요소들을 핸드헬드 촬영의 불안한 진동과 실험적인 카메라 구도로 붙들어낸 연출 감각도 눈에 띈다. 시야를 비트는 구도와 안개, 수면을 경계 삼아 감각을 교란하는 화면은 공간이 주는 압박을 차곡차곡 쌓고 점프 스퀘어는 그 긴장을 순간적인 충격으로 정확하게 터뜨린다. 여기에 저수지의 잔잔함과 물소리, 작은 움직임까지 증폭시키는 음향 설계가 더해지며 공포는 한층 촘촘해진다. 시각적 미장센과 점프 스퀘어, 음향이 맞물리며 '살목지'만의 체험을 완성하는 셈이다.
영화 '살목지' 4월 8일 극장 개봉 [사진=쇼박스]
그런 이유로 '살목지'는 일반관보다 특수 상영 포맷에서 더 진가를 발휘할 영화처럼 보인다. 스크린X와 4DX 등 공간감과 물리적 진동을 확장할 수 있는 포맷을 염두에 둔 듯한 연출은 관객을 구경꾼이 아니라 체험자로 끌어들인다. 사방을 감싸는 화면과 수중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떠올리게 하는 연출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관객 역시 살목지의 기척 안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앙상블도 훌륭하다. 김혜윤은 날카롭고 건조한 얼굴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고, 이종원은 극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인물임에도 자연스럽게 서사에 스며들며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김준한은 극을 한층 미스터리하고 서늘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장다아와 윤재찬 역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영화의 리듬을 환기한다. 무엇보다 경태 형제를 연기한 김영성과 오동민은 이 영화의 반가운 발견이다. 자칫 기능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인물들에 생활감과 온도를 불어넣으며 저수지라는 공간에 생활감과 현실감을 함께 더한다.
영화 '살목지' 4월 8일 극장 개봉 [사진=쇼박스]
'살목지'는 단순히 놀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에 붙들리는 감각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에 가깝다. 실재하는 저수지라는 공간 위에 픽션을 겹쳐 놓으며 공포의 중심을 장소 자체에 두고 고전적인 호러의 정서와 동시대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포개놓는다. 인물들이 겪는 혼란과 압박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관객 또한 그 감각 안으로 천천히 끌어들인다. 엔딩 크레딧이 오른 뒤에도 저수지의 습기와 압박이 오래 잔상처럼 남는다. 4월 8일 극장 개봉. 러닝타임은 95분이고 관람등급은 15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