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자회사 SK온이 미국 조지아주 커머스 공장에서 전체 인력의 약 37%에 해당하는 900여 명을 감원했다.
전기차(EV) 시장 성장 둔화와 완성차 업체들의 전략 변화에 따른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이 공장은 폭스바겐과 현대자동차 등에 배터리를 공급해 왔고 미국 포드의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에도 납품해 왔다.
그러나 포드가 해당 모델의 생산 계획을 사실상 접으면서 공급망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기차 수요가 기대만큼 빠르게 확대되지 못하는 가운데 완성차 기업들이 전기차 투자 속도를 조정하면서 배터리 산업 전반이 구조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이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최근 성장세가 둔화됐다. 판매 비중은 약 8% 수준에서 정체돼 있고 완성차 업체들은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차량으로 전략을 일부 수정하고 있다. 여기에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폐지와 자동차 규제 완화 등 정책 변화까지 겹치면서 산업 환경의 불확실성도 커졌다. 전기차 공급망 전체가 재조정되는 상황에서 배터리 업체의 생산과 인력 조정은 어느 정도 예견된 흐름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에서는 산업 정책과 일자리 문제가 곧 정치 문제로 이어진다. 조지아주는 전기차와 배터리 투자 유치로 대표적인 제조업 투자 수혜 지역으로 꼽혀 왔다. 이런 지역에서 발생한 감원은 산업 구조 조정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넘어 지역 경제와 정치 논쟁으로 확대될 여지도 있다.
한미 통상 환경은 이미 적지 않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미국을 방문해 통상 현안을 조율했다. 김 장관은 미국 상무부 하워드 러트닉 장관을 만나 관세 문제와 투자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여 본부장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통상 현안을 협의했다. 이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근거였던 국제경제비상권한법(IEEPA) 적용을 위법하다고 판단한 이후 미국의 관세 정책 방향이 다시 불확실해진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현재 미국 행정부는 무역법 122조와 232조, 301조 등을 근거로 새로운 관세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특히 무역법 301조는 외국 정부의 정책이나 관행이 미국 기업에 불리하다고 판단될 경우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통상 수단이다. 실제로 쿠팡의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 정부 정책을 문제 삼아 301조 조사 청원을 제기한 상황도 한미 통상 관계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산업 환경과 통상 환경이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의 미국 사업이 정치적 논쟁과 연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투자만 하고 고용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될 경우 장기적으로 기업 활동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업의 경영 판단을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게 방치해서도 안 된다. SK온은 조지아 공장 외에도 미국 내 배터리 생산 확대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와 함께 건설 중인 조지아 배터리 공장은 올해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며, 테네시 공장 역시 향후 전기차 배터리와 에너지저장장치 공급의 핵심 거점으로 추진되고 있다. 미국 배터리 공급망 구축이라는 큰 흐름 자체가 흔들린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대응이다. 기업은 산업 구조 변화 속에서 불가피한 조정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동시에 장기 투자 계획과 지역사회 기여 의지를 분명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정부 역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가 한미 산업 협력의 중요한 축이라는 점을 미국 정치권과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한 기업의 감원으로 보일 수 있는 이번 사안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 공방이 아니라 설득이다. 산업 현실과 투자 비전을 분명히 설명해 한국 기업이 불필요한 오해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한미 산업 협력의 기반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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