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확장재정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로 시중에 돈이 계속 풀리고 있지만 자금이 실물경제로 흐르지 않는 이른바 ‘돈맥경화’ 현상이 다시 심화되고 있다. 풀린 돈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 오지 못한 채 주식·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고이면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한은이 공급한 돈이 시중에 얼마나 유통되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승수(신M2 기준)는 지난해 11월 13.5배로 집계됐다. 이는 사상 최저치였던 2022년 7월(13.1배)에 근접한 수준이다. 2023년 11월 14.5배까지 올랐던 통화승수는 지난해 들어 줄곧 내림세를 보였다.
통화승수는 광의통화(M2)를 본원통화로 나눈 값으로, 한은이 본원통화를 1원 공급했을 때 창출되는 통화량을 의미한다. 통화승수가 하락했다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 등 경제주체들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지고, 경제활동을 통한 신용 창출이 줄었다는 뜻이다.
통화유통속도 역시 지난해 3분기 0.65로 사상 최저치(0.64)에 근접하며 하락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통화유통속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M2로 나눈 값으로, 시중자금 1원이 얼마의 부가가치를 생산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한은은 5만원권 발행 이후 통화승수가 구조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금리 인하 국면에서 예·적금보다 언제든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는 현금 보유를 선호하는 흐름이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 20일 기준 4대 시중은행의 요구불예금(수시입출식예금 포함) 잔액은 545조3088억원으로 지난해 12월(571조9407억원)보다 약 26조원 감소했다. 반면 주식 투자자예탁금은 1년 새 79.4% 늘어난 95조5259억원을 기록했다.
한은 관계자는 “통화승수 하락은 정기예금보다 수시입출금이 많이 늘면서 지준예치금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며 “주식·펀드 대기자금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고 금리 하락 국면에서 수익 추구 성향이 강해지며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 인하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시장에 유동성을 주입해도 기업의 생산과 투자, 가계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목표로 삼았던 소비와 투자 진작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구조조정 지연이나 자산 거품과 같은 부정적 효과만 두드러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량이 늘어나면 소비와 투자가 확대돼 경기 부양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지금은 주식과 부동산 가격만 부풀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경제는 기준금리를 지나치게 낮추면 금융과 실물 간 괴리가 더 커질 수 있는 구조인 만큼 중립금리에 금융 안정까지 고려한 매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안 교수는 “미국은 인공지능(AI) 산업을 중심으로 실물 투자가 버티고 있지만 한국은 이를 흡수할 혁신 기업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대기업 중심 구조를 넘어 혁신 기업이 새로운 성장 축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와 투자·고용 여건 개선 등 구조 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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