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이다. 누가, 왜 이 말을 처음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엄혹했던 외환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해외 국적의 한국인 투자자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시선이 배경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래서일까. ‘검은 머리 외국인’엔 탐욕, 투기, 무책임, 먹튀 등 온갖 나쁜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2025년 세밑을 향하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는 두 명의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시끄럽다. 마이클 병주 킴(Michael Byung-ju Kim)과 범 킴(Bom Kim)이다. 전자는 MBK 김병주 회장, 후자는 쿠팡 김범석 의장이다. 김병주는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10세 때 나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김범석은 서울에서 태어나 7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케이스다. 둘은 하버드대를 나왔다. 미국 시민권도 획득했다. 그리고 미국이 아닌 한국에 돌아와 큰 성공을 거뒀다.
사업가로서 그들의 기반은 '혁신'이었다. 선진국에서 검증을 마친 혁신 경영기법을 한국에서 적용해 성공 방정식을 썼다. 김병주는 글로벌 사모펀드에서 오랜 기간 PEF 일을 배운 뒤 2005년 MBK를 창업했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보편화되었던 차입매수(LBO)라는 방식으로 승승장구 했다. MBK가 이 방식으로 사들인 한국 기업만 수십개에 달한다. 김범석도 이에 못지 않다. 로켓배송을 통해 쿠팡을 일약 국내 e-커머스 시장 1위 기업으로 키웠다. 아마존 등이 시작한 유통·물류 선진기법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 변형했다. 코로나19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성공일 뿐 혁신은 아니라는 평가 절하도 있지만, 유통 시장 판도를 단기간에 급변시킨 건 나름의 성과다.
두 '킴(Kim)'은 이렇듯 글로벌 혁신기법의 선제적 도입으로 부(富)를 이뤘다. 김병주의 MBK는 20년 새 300억 달러를 굴리는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로 커졌다. 김병주 자신도 한국 최고의 부자 1, 2순위에 꼽힌다. 김범석도 쿠팡(모기업 쿠팡Inc)의 나스닥 상장을 통해 30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개인 재산도 조(兆) 단위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까지였다면 둘의 성공 스토리는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이 절묘하게 섞여있는 서사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홈플러스 사태, 3370만명 정보유출로 이 성공의 서사는 무너졌다. 무엇보다 대중을 분노케 하는 건 '책임 회피'의 태도다. 국적 여부를 떠나 사업의 근간이 되는 한국에서의 경영관리 실패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둘의 자세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나마 김병주는 6개월여를 버티다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과했다. 구체성은 떨어지지만 사재 출연도 약속했다.
반면 김범석은 여전히 회피에 급급하다. 쿠팡Inc는 미국에 본사를 둔 해외기업이고 정보유출이 터진 쿠팡은 한국 자회사라는 점, 그리고 본인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점, 이것이 김범석과 쿠팡이 책임 회피에 나서는 논리다. 이 논리를 지키는 건 국회 보좌관 출신을 대거 영입해 쌓은 대관(對官)의 방벽이다. 그래서 국회의 국정감사나 청문회에 나오라는 요구에 일절 답이 없다. 빗발치는 책임론에 쿠팡 한국 대표만 물러나는 시늉만 냈다.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기업도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게 요즘이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는 쿠팡의 경영자에게 '사회적 책임'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하물며 쿠팡과 김범석의 국적은 미국이지만 돈은 한국에서 90% 이상 번다. 그런데도 사상 최악의 정보유출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걸 어찌 봐야 할까. 언제까지 "내 머리는 검지만, 난 미국인"이란 말로 피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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