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의 번영과 교류 협력을 주도하는 글로벌 책임강국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최초로 인공지능과 저출생·고령화 등 인류가 공동으로 직면한 도전과제를 함께 풀어가기로 합의했고, 문화창조산업을 APEC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명문화함으로써 향후 K-컬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공고히 했다”고 밝혔다.
APEC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글로벌 책임강국’으로서 인류가 직면한 현안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과시했다. 문재인 정부는 ‘글로벌 선도국가’를 지향하고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추진했고,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내세우고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들이 ‘글로벌’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세계의 핵심 국가 반열에 들어섰다. 핵심 국가는 세계적 단위의 노동분업에서 첨단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했다는 것을 뜻한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철강, 방산 등 주요 산업의 대한민국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움직이는 핵심 부품은 반도체인데, 엔비디아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우리 반도체를 사용한다. 해양패권의 핵심인 조선 산업에 있어서도 우리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화 부문에서도 한류(K-컬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우리가 반사이익을 누리는 점도 있다. 미국이 대중국 수출입 통제에 나섬에 따라 중국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주가 상승도 이러한 현상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관세협상에서 한국이 3500억 달러를 미국 현지에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원조를 받던 나라가 미국의 핵심 산업에 투자를 하는 나라로 국력이 커졌다. 우리는 미국에서 1976년까지 125억 달러(경제원조 57억 달러, 군사원조 68억 달러) 원조를 받았다. 한국은 이승만 정권 당시 수입대체산업화를 모색하다가 자원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아 본격화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을 추진하여 근대화에 성공하고 지금의 글로벌 핵심 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사례다. 2021년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는 57년 역사상 최초로 한국이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했다고 발표했다. ‘유치를 통한 개발촉진 전략’을 채택한 한국형(박정희식) 개발모델은 중국 덩샤오핑 지도부의 개혁·개방과 선부론(先富論)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이 대외 종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개방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부상한 한국과 대만은 반공의 전초기지로서 지정학이 작용하여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을 그들의 뒤뜰 정도로 인식하고 종속화하려 할 때 자원이 풍부한 브라질과 멕시코는 수입대체산업화전략을 추진하여 경제발전을 이뤘다. 한국과 대만이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선진국에 예속당하지 않고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관료적 권위주의체제가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개발독재를 추진하여 경제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중산층이 늘어났고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이 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성공적인 ‘포용국가’가 됐다.
한국은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저임금·저곡가 정책을 추진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배제하고, 재벌을 육성하여 해외 다국적 또는 초국적 기업에 의한 국부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공산세력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을 통한 군사력 증강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이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지속했던 것이다.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노동분업을 통해서 기술력을 확보한 우리가 이제는 세계적 단위의 노동분업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MAGA)와 미국의 조선업을 부활시킨다는 계획(MASGA)에 참여하게 됐다. ‘글로벌 책임강국’을 표방한 우리가 한·미 동맹의 관점에서 미국을 돕는 시대가 됐다는 것은 격세지감이다.
북한은 최근 한·미 동맹 강화와 경제협력 심화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북한은 지난 11월 18일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최근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들에 대해 “‘미국우선주의’ 실현에 철저히 복무하는 주종관계의 심화”라고 규정했다. ‘자강력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북한은 대규모 대미 투자와 공산품과 농산물 개방으로 한국의 대미 종속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현실은 미·한 동맹관계가 결코 그들이 말하는 호혜적이고 평등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상전과 주구 사이의 철저한 종속관계이며 미국의 이익만 추구될 뿐 한국의 이익은 철저히 무시되는 ‘미국우선주의’ 실현의 외통길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론적 적실성을 상실한 1960대와 1970년대에 유행했던 종속이론의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미 투자는 미국의 강요에 의한 투자일 수 있지만, 대미 종속이 아니라 우리가 비교 우위를 갖는 부분에서 미국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노동분업의 우위를 활용하여 국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면 된다. 대미 안보 의존을 극복할 때까지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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