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개그계의 단군, 전유성 — "재밌는 일이 곧 내 인생이었다"

전유성 사진 김호이 기자
故전유성 [사진= 김호이 기자]

한국 코미디의 초석을 놓은 원로 개그맨 전유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개그계의 단군”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무대에서 웃음을 주던 개그맨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기획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직업을 해볼 생각조차 안 했어요. 그냥 내가 잘하는 걸 오래 한 거죠.”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20대 청년에서 한국 개그사의 전설로

전유성은 20대에 KBS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당시만 해도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그는 특유의 창의성과 집요한 실험 정신으로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냈다. 스탠드업, 콩트, 토크쇼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 무대에는 늘 ‘새로운 웃음’을 향한 그의 열정이 묻어 있었다.

그는 웃음을 만드는 일을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소명'으로 여겼다. “개그맨은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그의 정의는 지금도 후배 개그맨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재밌는 일을 오래 하려면 젊을 때부터 준비해야”

그가 남긴 여러 인터뷰 가운데 가장 자주 회자되는 구절은 이것이다.
“갑자기 하려면 못 해요. 20대, 30대 때부터 해온 일이니까 지금까지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오래 즐겁게 일하고 싶으면, 젊을 때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에게 ‘준비’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작은 무대라도 시도해보며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그는 “나는 남들보다 앞서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늦게 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즉흥적인 번뜩임보다 오랜 시간 다져온 습관과 관찰이 그를 무대에 서게 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장면 사진 김호이 기자
인터뷰 장면 [사진= 김호이 기자]

엉뚱함 속의 깊이 — 아이디어의 원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시집을 많이 봐요. 시집에는 비유가 많잖아요. 개그도 결국 낯선 연결에서 나오거든요.”

그의 일상도 아이디어의 보고였다. 책 제목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책모양 베개 같은 엉뚱한 발상을 스스럼없이 꺼내놓았다. 그에게 웃음은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후배들을 위한 선배, 그러나 ‘스승’은 거부

많은 후배 개그맨들이 전유성을 ‘스승’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호칭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스승이 되고 싶지 않아요. 선배는 그냥 길을 먼저 걸었으니까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조금 도와줄 뿐이죠. 그것도 돈을 받지 않고요.”

실제로 그는 수많은 공연과 프로젝트에서 후배들을 무대에 세웠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많은 개그맨들이 “내가 설 수 있었던 무대는 전유성 선생님이 열어주신 것”이라고 회고한다.
 
전유성이 전한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전유성이 전한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무대 밖에서도 개그맨이었던 사람

무대에서만 웃겼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진지하게 인생을 이야기하다가도, 다음 순간 엉뚱한 농담을 던지며 주변을 웃게 만들었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제목만 알아도 즐겁다”는 말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유머는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힘든 순간에도, 나이 든 이후에도 그는 늘 ‘재밌는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다른 직업을 넘보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온 게 내가 잘한 것”

돌아보면 전유성의 삶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내가 가장 잘한 건, 다른 직업을 넘보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온 거예요.”

그는 개그를 단순한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개그는 그의 삶이었고, 그는 평생 그 길을 걷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웃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전유성은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웃음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기획한 공연과 축제, 그가 키운 후배들, 그리고 그가 남긴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국 대중문화 곳곳에 스며 있다.

그는 언제나 “재밌는 일이 곧 내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이 되었다.

그가 떠난 무대는 텅 빈 듯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그의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 개그사의 단군, 전유성.
그는 떠났지만, 웃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전유성과 사진 김호이 기자
故전유성 [사진= 김호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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