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병 시사평론가]
대한민국 보수가 가야 할 길 ⑤
“서유럽에서는 핵심적인 민주주의 규범을 체계적으로 두들기고 깨트리는 정당들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이집트에서 태국까지, 막 시작된 민주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고 기존의 민주주의가 독재주의로 후퇴하고 있다.” 민주주의 위기 문제에 천착하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뭉크(Y.Mounk) 교수가 그의 저서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2018년 출간했으니 벌써 7년 전의 분석이다. 그 이후 그의 지적대로 유럽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대거 급부상하거나 이탈리아처럼 아예 집권한 사례도 나왔다. 지난해 6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도 정치적 반대자를 향해 진정한 국민, 애국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서 이것이 ‘포퓰리즘이 상대방을 적대화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야당을 ‘범죄자 집단’으로 매도했던 윤석열 정권은 그로부터 6개월 뒤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탄핵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규범을 파괴하고 독재주의로 나아가던 윤석열 정권은 결국 평범한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몰락한 것이다. 뭉크 교수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목도하고 그 회복력과 손상된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다. 누구든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라 하겠다.
최근 유럽 정치는 극우세력의 급부상과 함께 전통적 민주주의의 쇠락이 확연히 눈에 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오스트리아 등 주요국들의 정치지형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기존 주류 정당들이 고전하고 그 자리에서 극우 또는 포퓰리즘 정당들이 약진하는 모양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도 예외가 아니다. 대통령중심제 특성상 극우가 제3당으로 급부상하기는 어렵지만, 대신 기존 보수 정당을 ‘삼키는’ 방식이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과거 링컨의 공화당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수로서의 가치, 규범, 전통, 정책 등에서 ‘질적으로’ 많이 달라졌다. 물론 당원들의 의식도, 정치인들의 품격도 놀랄 만큼 달라졌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배경이다.
극우의 정치세력화 물결은 급기야 일본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달 20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를 외친 극우 참정당이 크게 약진했다. 불과 창당 5년 만이다. 군국주의 망령이 여전한 일본 정치에서 극우 정당의 약진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일제 강점기 피눈물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역사를 칭송하는가 하면, 지난 15일에는 소속 의원들이 단체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한국, 중국 등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난징 대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등 역사왜곡에도 앞장서고 있다. 물론 ‘혐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유튜브를 통해 자극적이고도 저급한 발언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역시 청년들이 핵심 지지층이다. 유럽의 극우화 흐름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보수정치를 표방한 국민의힘이 사실상 몰락 수준으로 치닫자 그 우군으로 있던 극우세력이 당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친위쿠데타’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한국 정치에도 ‘극우의 도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극우는 보수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기성 보수 정당의 중심부터 장악하고, 끝내는 극우정권까지 만들어 내겠다는 목표다. 유럽식의 극우 신당 창당과 뒤이은 정권장악이 아니라 미국처럼 기성 보수 정당부터 장악하는 방식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의 일반적 경향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당장 그 목표가 된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민의힘 내부의 혼란은 극우세력과 보수개혁세력의 파워게임이 본질이다.
극우가 국민의힘에 파고들어 당권까지 노린 데는 당 지도부를 비롯한 당권파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들은 극우에게 운동장을 내줄 경우 당내 혼란과 정체성 시비, 보수의 자멸 등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실제로 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극우의 준동이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다고 봤던 것이다. 당 지도부와 당권파는 ‘인적 쇄신’을 표방한 보수개혁세력의 당권 장악이 더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자칫 그들의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의 준동을 보며 어쩌면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당 지도부를 비롯한 당권파의 기득권 유지에 마냥 박수를 쳐준 핵심당원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당원들에게 책임을 묻긴 어렵다. 책임은 책임이 있는 당 지도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수 개혁의 조건은 현실적으로 보수정치의 본령인 국민의힘에 달려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의힘 지도부를 비롯한 당권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직결돼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권파는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과 직결된 보수 개혁에 선뜻 나서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거부한다면 현실적으로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보수 개혁의 결정적인 ‘딜레마’이다. 국민의힘 당권파는 인적 쇄신이 예고된 보수 개혁의 길보다는 차라리 ‘극우와의 공생’이 더 유리하다고 볼 것이다. 따라서 보수 개혁의 조건부터 당내 기득권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핵심 당원들의 저항과 개혁 의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보수 개혁을 표방한 인사들이 집단 탈당해서 신당을 만들기도 어렵다. 설사 기호 3번이라도 선거 때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 개혁의 화두는 당내 문제를 넘어서 구조적인 문제부터 풀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변화, 선거법 개혁을 통한 다당제 정착, 지역주의에 매몰된 정당체제 개혁 등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해법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것은 여당과 합의해야 할 사안이기에 간단치가 않다. 그렇다면 먼저 국민의힘 내부에서 할 수 있는 보수 개혁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당 지도부를 비롯한 당권파가 보수 개혁에 반대한다면 결국 ‘당내 투쟁’뿐이다. 당 안팎의 극우세력에 대한 보수개혁세력의 전면적 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우호 세력을 결집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당권을 장악해서 당헌·당규부터 바꿔야 한다. 영남의 당심이 아니라 수도권 당심과 민심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치열한 당내 투쟁도 감수해야 한다. 모두 자초한 일이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국민의힘은 극우 정당으로 변모할 것이며 머지않아 ‘극우의 전성시대’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 보수는 정말 위험한 순간을 맞고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시사평론가(현) △인하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선거방송심의위원(전) △혁신과미래연구원 원장(전)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