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8월 9일, 손기정(1912~2002)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시상대 맨 윗단에 올라선 손기정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승리의 함성에 빠져있던 손기정은 국기 게양의 순간 일장기가 올라가자 충격을 받는다. 그때까지는 일본을 위해 달린다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 저 민족의 울분과 굴욕의 상징 일장기가 올라가다니…나는 코리아의 손기정이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왜 나의 우승에 일장기가 올라가야 하는가. 왜 '기미가요(일본국가)'가 베를린 하늘에 울려 퍼져야만 하는가.”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14쪽)
손기정은 올림픽 무대에서 자신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글 사인이었다. “수많은 축하객을 만나는 동안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리느냐는 것이었다. 자주 말썽이 나면서도 나는 '손긔졍'이라는 한글 사인과 곁들여 조선 지도를 그려주거나 'KOREA'라는 영문자로 국적을 써주었다. 조선, 일본 사람을 빼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 내게 하루에도 수십 명씩 외국인들이 사인을 요구하고 악수를 청해왔다.” (자서전 183쪽)

국립중앙박물관의 광복 80주년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에서는 이러한 사연이 담긴 ‘KOREAN 손긔졍’이라고 서명된 작은 엽서의 실물이 최초로 공개된다.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우승 직후인 1936년 8월 15일 어느 독일팬에게 사인해준 것이다.
손기정은 올림픽 무대에서 ‘손긔졍’이 아닌 ‘손기테이(일본식 발음)’였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상장에는 'KITEI SON JAPAN'이라고 이름과 국적이 적혀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에도 본문엔 ‘120파운드의 한국 출신 청년’이라고 그를 소개하지만, 기사 제목엔 일본인으로 돼 있다.

손기정은 우승날 밤 일본 선수단 본부가 선수촌에 마련한 축하 파티가 아닌, 베를린에 살고 있던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씨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생 처음 태극기를 본다. “'이것이 태극기로구나. 이것이 우리의 깃발이로구나'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잃어버린 조국, 죽은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조선 민족도 살아 있다는 확신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서전 180~181쪽)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의 집안은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다. “달리기만이 어떤 장애도 없고, 비용도 들지 않는 멋진 운동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운동이 바로 달리기였다”고 한다. 그가 다녔던 보통학교로 가는 2km가량의 자갈밭, 압록강 둑길, 강변의 모래밭이 연습장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부잣집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그는 베를린올림픽에서 달리면서 어머니와 가난을 생각했다. “홍수로 떠내려 가버린 집, 찌든 살림에 행상 보따리를 이고 나서던 어머니, 뜀박질로 땀 밴 솜옷을 빨아대기 힘겨워서 여자 고무신을 사 신기던 어머니, 그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서라도 달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들의 고집에 꺾여 끝내는 주머니를 털어산 '다비(일본식 버선)'를 행상 꾸러미에서 꺼내 주시던 어머니, 그러고는 아들의 성공을 눈물로 기원하시던 어머니”를. (자서전 13쪽)
손기정은 1984년이 돼서야 올림픽에서 손기정이라고 불린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폐회식에 손기정을 초청해 10만 관중에게 그를 “손기정, 코리아!”라고 소개했다. 올림픽에서 늘 손기테이로 불렸던 그는 진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조국의 젊은이를 생각했다.

“올림픽에서 늘 손기테이라고 불려왔던 나는 손기정이라는 소개에 신선함마저 느꼈다. 온 세계 사람들에게 나의 국적은 한국이고 이름은 손기정이라고 드디어 알리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구나.' (중략) 나라를 가진 민족은 행복하다. 조국 땅 위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386쪽)
이번 전시에서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를 위한 특별 부상품인 '청동투구'와 더불어 손기정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금메달'과 '월계관', '우승상장'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는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기념 특별전 이후 14년 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는 것이다.
전시는 상설전시관 기증 1실에서 7월 25일부터 12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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