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으로 활동하면서 피해자에게 받은 거액의 현금을 제삼자에게 송금한 남성에 대해 대법원이 사기 범행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외형상 단순 심부름처럼 보이는 업무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정황이 분명했다면, 범죄임을 인식했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취지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사기 및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모(31)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씨의 행위에 대해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한 것을 알았거나, 적어도 미필적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씨는 2022년 3월, 한 구직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통해 일명 ‘김미영 팀장’이라는 인물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았다. 이후 약 두 달간 이씨는 피해자 8명을 직접 만나 금융감독원장 명의 문서를 건네고, 이들로부터 받은 약 1억7천만원을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해 조직 계좌로 송금했다.
1심 재판부는 이씨의 행위에 사기 공모가 있었다고 보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이씨가 범죄임을 몰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외견상 정상적인 급여 대행업무로 보였고, 이씨가 실제 업무 내용을 의심할만한 뚜렷한 사정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판단을 뒤집었다. 먼저 업체의 조직과 실체, 업무 범위에 대한 기본적인 확인조차 하지 않은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피해자로부터 수천만원의 현금을 수령하면서도 액수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업체와 무관한 제삼자에게 ATM으로 송금하는 방식 또한 “정상적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주목된 것은 이씨가 이력서를 게시한 구직 사이트에 기재된 주의 문구였다. “채권추심 명목으로 현금을 수거·전달하라는 경우, 채용을 빙자한 보이스피싱 사기일 수 있다”는 경고 문구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대법원은 이씨가 자신의 행위가 불법임을 강하게 의심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씨가 피해자들에게 전달한 금융감독원장 명의의 공문 역시 형식이나 내용이 조악하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급여대행업체의 문서로 보기 어려웠고, 위조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조직과의 연결고리를 직접 인지하지 않았더라도, 업무의 성격과 절차가 통상적이지 않고 범죄 정황이 뚜렷하다면 미필적 고의에 따른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법리를 명확히 했다. 최근 비대면 방식으로 인력을 모집해 범행을 분절화하는 보이스피싱 범죄의 특성을 고려할 때, 말단 실행자의 책임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도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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