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의 미술마을 正舌] 정말, 지금 미술비평은 위기일까? 

  • 비평, 가라앉는 배

  • 미술비평은 진화 중?

  • 결국 독자 또는 소비자의 책임 

가브리엘 본 막스 예술을 평가하는 원숭이들 1889 유화 85x107cm 뮌헨 신회화관 소장 사진Wikipedia
가브리엘 본 막스 예술을 평가하는 원숭이들 1889 유화 85x107cm 뮌헨 신회화관 소장 [사진=Wikipedia]
 
비평, 가라앉는 배
1980년~9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미술 동네 사람들은 미술 비평의 위기를 말하며 때로는 미술 비평이 죽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 비평은 정말 종말을 맞이한 것일까. 아니다. 오늘날에도 미술비평은 여전히 건재하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미술 비평을 멸종위기종처럼 인식하고 있을까. 

아마도 이런 배경에는 소위 기존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에서 미술 비평란이 사라지고, 전문 비평가들의 비평문보다는 일반 기자들의 보도용 기사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분석하고 해석하며, 작가의 의도와 작품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비판적인 전통적인 비평문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 덕분에 모든 사람이 모두 비평가의 역할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고, 견해를 밝힐 수 있게 된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전과 달리 더 이상 딱딱한 비평문을 즐겨 읽는 사람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다. 전통적인 신문 구독자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세상은 지난 100년 동안 변화한 것보다 10여 년 동안 발전한 것이 지난 100년을 뛰어넘을 만큼 급격한 변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미술계의 변화도 당연한 것으로 물론 미술비평의 존재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미술계의 지형도에서 가장 큰 변화는 큐레이터의 역할이다. 과거에는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해석하는 중요한 역할을 미술 비평가의 몫이었지만, 1990년데 말부터 큐레이터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전시 기획과 작품 해석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갔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한정되었던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점차 확산되고 비엔날레 등 대형국제미술행사가 늘어나면서 큐레이터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미술비평가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미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미술품의 상업적 가치가 주목을 받자, 비평보다 시장의 논리가 작품평가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미술비평의 순수한 비판적 기능을 저해하고, 비평이 시장의 입맛이나 특정 기호를 지닌 이들의 취향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오며 비평의 신뢰도가 낮아지기 시작한 것도 비평의 부재 또는 종말을 걱정하게 된 이유다. 

사실 과거에는 미술 잡지나 신문 등 제한적인 매체를 통해 미술비평이 이루어졌으나, 인터넷, 블로그,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누구나 쉽게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면서, 미술비평의 권위가 희석되고, 전문적인 비평과 아마추어적 의견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동시대 미술이 다양한 개념과 표현 방식을 실험하며 점차 난해해지고, 사회적인 이슈에 집중되면서 이런 작품에 대한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비평을 개진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미술비평 자체의 필요성과 효용성에 관 한 의문이 제기된 것도 이유다. 


게다가 자체적인 미술비평의 기준이 분명하지 못해 혼란을 자초한 것도 미술비평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동시대 미술은 특히 과거와 같은 명확한 미적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 비평가들은 다양한 이론적 틀을 적용해 작품을 해석하지만, 통일된 기준이 없이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면서 비평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떨어뜨려 비평자체가 신뢰를 잃은 것도 원인이다. 게다가 일부 미술비평은 전문용어와 난해한 이론에 치우쳐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자신의 비평을 읽고, 이를 이해하는 비평가가 있을 까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비평은 미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고, 미술비평이 단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게만 유효하다는 비판도 있다.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술비평가는 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미술계의 담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노릇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 지면 등 플랫폼 부족 등으로 인해 그 역할이 축소되고 위상도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비평의 위기는 사회적인 권위가 사라지면서 과거 영향력있는 비평가의 해석에 의존하던 대중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경험과 소통을 통해 자신이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이런 경향은 미술품에 대한 해석 역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미술 비평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도 원인이다. 

더구나 지식 중심의 시험사회인 한국의 특별한 상황은 더더욱 비평의 입지를 어렵게 했다. 언제부터인지 "아는 것만 보는 것"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퉁 치면서 ‘문화해설사’가 등장하고 설명을 해주는 이가 없으면 작품이건 문화유적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관람객들에게 작품, 작가 그리고 각 시대 미술의 흐름 따위를 설명해 주던 도슨트(Docent)가 한국에서는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이들은 관객의 ‘보는 재미’가 아닌 ‘듣는 재미’를 위해 작가나 작품 그리고 미술사 등에 얽힌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십(Gassip)이나 에피소드(Episod) 또는 근거가 약한 설을 타고난 언변을 바탕으로 해석이 아닌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이런 관행이 일반적인 미술 감상법으로 인식되면서 미술 비평의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따라서 많은 논문과 책은 미술 비평을 “진행형”이라고 부르지만실제는 “죽어가는 예술의 한 형태”, “쓸모없는 직업”, 또는 “가라앉는 배”라고 부르며 거의 멸종된 장르로 규정한다. 
 
미술비평은 진화 중?
하지만 미술비평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번창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를 띠고, 낡은 껍질을 깨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의미 있는 활동으로, 사그라들지 않고, 여전히 논쟁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만 비평이 존재하는 플랫폼이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 비평은 구독을 통해 운영되는 비디오, 글쓰기, 팟캐스트, 크리에이터 중심 커뮤니티를 위한 미디어 플랫폼 서브스택(Substack), 인스타그램(Instagram), 유튜브(YouTube) 또는 틱톡(TikTok) 같은 매체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이 새로운 방식의 글을 쓰고 있다.

이제 권위있는 언어를 구사하던 비평가 집단이 예술가의 경력과 작품의 평가를 좌우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런 권력은 어떤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비평가의 개인적인 인기나 명성보다 비평문의 질이 더 중요해진 것은 긍정적이다. 통찰력 있고, 예리하며, 창의적인 비평은 시대를 초월해 독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와 논의를 끌어내는 비평 또한 그 가치를 유지하며 계속되며 언제나 미래와 독자를 확보할 것이다. 결국 예술이 있는 한 예술비평은 영원할 것이다.
 
알렉산드르 가브리엘 디캠프 전문가들 1837 유화 464x64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Wikipedia
알렉산드르 가브리엘 디캠프, 전문가들, 1837, 유화 46.4x64.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Wikipedia]

따라서 미술비평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좋은’ 미술비평이 위기에 처했을 뿐이다. 좋은 미술비평은 묻힌 진실을 드러내고, 취향과 유행을 선도하는 이들의 주장에 도전하며, 우리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평으로 작품의 맥락을 파악하고 형식적인 분석을 통해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 주제, 상징 등을 다각적으로 해석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비평을 말한다. 비평은 독자들이 작품을 직접 보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 훌륭한 작품을 보는 것만큼이나 변화를 줄 수 있다. 때로는 비평이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을 바깥세상과 연결하고, 누가 어떻게, 마케팅하고, 사고팔았는지 그 실체를 파헤치기도 한다. 

오늘날 미술비평의 진짜 문제는 비평의 기본을 망각한 유사 미술비평이 횡행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호불호 또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악의적인 행위자(Malicious actors), 스스로 판단보다 특정 세력이나 이념에 따라 그들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유용한 바보(Useful idiots), 예술계 내부의 피상적인 유행이나 인맥에 의존해 깊이 있는 분석 없이 피상적인 언급만 하는 무의미한 씬스터(Meaningless scenester), 유명 작가나 화랑 또는 경매사에 아첨하며 객관적인 비판 능력을 상실한 스타 퍼커(Pathetic star fucker), 작가나 화랑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기거나 약간의 수식을 보태는 보도자료 재활용자(Press release recycler),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이론과 작품과의 연관성을 설명 못하거나, 학문적 용어만 지나치게 사용하는 지루한 이론가(Tedious theorist), 작품의 피상적인 시각적 요소나 스타일에 집착해 작품의 의미나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겉핥기식 논평만 늘어놓는 그래픽 매니아(Hopeless graphic fetishist), 상업적 목적으로 특정 작품이나 전시를 홍보하며 객관적 시각을 포기하고 돈을 받는 인플루언서(Paid influencer), 주목을 끌고자 자극적 언어로 논란을 일으키는 주장을 앞세우며, 깊이 있는 사고나 논리적 근거 없이 감정적인 반응만 유도하는 싸구려 도발자(Cheap provocateur), 사회적 맥락이나 의미에 대한 고민 없이, 피상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태도로 매사 무의미하다는 주장만 늘어놓는 비정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엉터리(Apolitical and nihilistic bullshit artist) 같은 비평가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결국 독자 또는 소비자의 책임 
우리 숲에 이런 유사 미술비평이 많다는 것은 생태계가 번성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진 때문에 이런 잡초도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생태계라 하더라도 포식자, 해충, 잡초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정의와 실천 능력에 대한 낡은 정의에 집착할 때 미술비평의 위기가 온다. 시대정신에 휩쓸려가는 수많은 추억처럼, 미술비평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는 열망을 지닌 이들은 서구 중심의 미학적 기준에 따라, 추상 미술이 아닌 모든 것을 경멸했던 20세기 중반, 그리고 우리처럼 객관적 과학적인 기준없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을 적은 인상비평(Impressive criticism)의 시대로 복귀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틱톡의 40초짜리 핫 테이크 영상이나 인스타의 짧은 두세 줄의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미술비평이 아니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미술비평의 언로가 넓어졌고 누구나 비평가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미술비평이 종말이 온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화상과 컬렉터 그리고 큐레이터일 것이다. 이들은 사실 비판적이지 않은 평이한 미술 글쓰기를 조장하고 후원한다. 1965년 해리슨(Harrison Colyar White, 1930~2024)과 신시아 화이트(Cynthia Alice White)가 지적했듯이, “딜러-비평가”시스템은 19세기 중반 파리 살롱에서 출발했지만,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형화랑이나 경매사들은 자체적으로 화려한 홍보용 미술 잡지 또는 사이트를 운영하거나 특정 잡지나 매체를 후원하며 작가와 비평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객관적인 비평을 저해하고, 상업적인 성공을 위한 홍보 수단으로 비평을 끌어내린다는 걱정을 실제로 보여 준다. 끊임없이 새로운 트렌드와 스타작가를 내놓고 이를 소비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경향의 등장, 기존 작가의 인기 하락 등 자기영속적인 일시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미술상들은 보통 이상의 고료를 비평가에게 지불하며, 충실한 보도자료와 카탈로그 에세이, 호화로운 여행과 함께 VIP 고객의 접대를 맡기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에 관한 글쓰기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글쓰기로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하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글쓰기에 대한 애정 때문에 글쓰기를 고수하고, 시장에 유리한 허접한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거부하며 고군분투하며 글쓰기에 열중한다. 미술에서 비평은 사람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 가끔 근육을 당기더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판단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미술 또는 그 제도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려면 비평가는 자신의 우려를 넘어 상대적이고 냉정하게 고려하는 더 큰 틀을 설정해 개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사유의 결과는 효과적인 문장으로, 다음은 정확한 단락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정당한 논점이나 제안을 제시하며, 담론을 생산하거나, 문화적 문제를 발굴하거나, 건강한 문화적 공동체를 위한 구체적인 단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비평문은 예술적 비판을 전달하는 행위로 정의상 때로는 다소 무자비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은 예술 비평의 양을 증가시켰지만, 그 모든 것이 반드시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나 화랑은 인터넷보다는 잘 알려진 출판물의 비평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제는 홍보 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작가의 명성과 예술적 가치가 지닌 위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온라인이나 SNS상의 비평은 예술가의 자존감을 순간적으로 높여준다. 하지만 이런 온라인상의 비평이 진정한 예술적 성취나 깊이 있는 소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피상적인 인정은 쉽게 휘발되고, 예술가의 성장에 실질적이며 장기적인 동력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모든 비평이 소셜 미디어의 짧은 형태로 압축되면서, 작품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비판적 담론이 자리를 잃을 수 있다. 따라서 얄팍한 칭찬이나 단순한 감상 또는 흥미만 유통되고, 작품의 복잡성과 다층적 의미는 간과되고 만다. 또 온라인의 ‘언급’ 자체가 일종의 홍보 수단이 되면서, 작품이 순수한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품으로 인식되기도 하면서 작가와 화랑은 작가의 작품을 알리며 ‘팔리는’ 작품이란 이미지로 포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깊이 있는 분석 없이 단편적인 정보만 접하는 독자는 예술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보다는 상품 또는 장식품으로 이해하면서 예술과 대중 사이의 건강한 소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또 온라인의 피상적 반응에 익숙해진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작가의 독창성과 실험 정신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결국 온라인 환경이 예술의 수용과 평가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예술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독자 모두가 이런 변화의 흐름을 간파하고, 피상적인 온라인 인정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탐구하고 소통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처지에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쉽게 미술비평을 접하게 되면서 러시안 룰렛처럼 위험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가짜뉴스를 구분해 내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가려먹듯이 미술비평과 미술전람회, 미술작품을 선택하는데도 자신의 책임하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미술비평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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