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42) 참된 우정의 표상 - 관포지교(管鮑之交)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5세로 OECD 국가 중 5위이다. 인생 백세 시대가 더이상 꿈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노년의 큰 경사로 여기던 회갑 잔치가 사라지고 칠순 잔치도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옛말이 되었고,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한 게 시대에 걸맞는 진짜 나이라는 신종 계산법이 상식의 반열에 올랐다.

은퇴 후 삶이 길어진 만큼 인생 후반전을 잘 보내는 게 한층 더 중요해졌다. 대중매체나 SNS에는 노년에 반드시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한 다양한 조언이 쏟아진다. 이를테면 '노후 십계명' 같은 것들이다. 버전에 따라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돈ㆍ건강ㆍ친구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필수항목이란 얘기다. 돈 없고 건강을 잃은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도 있을 만큼 적정 수준의 경제력과 건강이 행복한 노년의 필요조건이라면, 친구는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충분조건이다.

어디 노년 때뿐이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길 어디에서나 친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정한 사랑도 드물지만 진정한 우정은 더욱 귀하다는 말도 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에 걸쳐 친구, 혹은 우정에 관한 명구와 금언들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이는 본고의 밑바탕을 이루는 고사성어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의 주역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고 천하를 도모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비롯해서 자기를 알아주는 벗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백아의 고사에서 유래한 '백아절현(伯牙絕絃)'과 '지음(知音)', 유비가 제갈공명과의 만남을 일러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한 '수어지교(水魚之交)', 친구 사이가 어찌나 친밀한지 쇠보다 단단하고 향기롭기가 난과 같다는 '금란지교(金蘭之交)', 목을 내주어도 좋을 친구 사이라는 '문경지교(刎頸之交)' 등등 장구한 중국 역사 속에 명멸했던 인물들이 맺은 친교와 우정은 숱한 이야기와 성어를 낳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중과 포숙아가 남긴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참된 우정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 사람 포숙아(鮑淑牙)는 어릴 적 친구 관중(管仲)의 비범함을 깊이 흠모하여 그를 믿고 아끼고 이해하며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었다. 같이 동업을 했을 때 관중이 매번 더 많은 수익금을 취해도 포숙아는 친구가 형편이 어려우니 당연하다고 했다. 관중이 여러 번 실패와 좌절을 겪어도 그가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감쌌다. 심지어 서로 정적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 후 권력투쟁에서 패한 관중이 목이 달아날 지경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주군 환공에게 관중을 중용할 것을 강력 추천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관중은 타고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환공을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첫 번째 패자로 만들었다. 관중에게 있어서 포숙아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서양 속담 그 자체였다. 훗날 관중은 자신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던 시절부터 포숙아가 늘 변함없이 믿고 이해하고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세상사람들은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일러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했다. 출전은 《사기ㆍ관안열전(史記ㆍ管晏列傳)》이다. 후세의 귀감이 되는 우정을 전하는 옛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신의(信義)'다. 신의가 무엇인가. 믿음과 의리다. 친구란 신의가 바탕이 되어 믿음을 주고 받고 의리를 지키는 관계다. 삼강오륜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들어 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견인한 화랑들의 수양 계율 세속오계에 벗을 사귐에 믿음으로써 하라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 당당히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허나, 아는 것을 행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세상사 아니던가. 시성 두보는 '빈교행(貧交行)'이란 시에서 사람들이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할 적 우정을 잘 알건만 친구간에 신의를 지키기는커녕 이해득실을 따지고 손바닥 뒤집듯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태를 통탄했다. 두보의 시를 감상해 보자.

손바닥 뒤집으면 구름이요 엎으면 비가 되니
어지럽고 경박한 무리들을 어찌 다 헤아릴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할 적 사귐을 
요즘 사람들은 그 도리를 흙처럼 내다 버리네.

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君不見管鮑貧時交,  此道今人棄如土

며칠 전 중국고전을 공부하는 학우들과 함께 청와대를 둘러보았다. 백악산 너른 품에 깊숙이 안겨 있는 녹음 짙은 과거 권부의 상징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떠올렸다. 이 무상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전투구에 아귀다툼을 벌이느라 세상이 늘 시끄럽다. 천수백 년 전 두보가 통탄해 마지않던 세태의 부박함이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까.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공자 말씀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무릇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의는 기본 중의 기본이건만, 그걸 솜털처럼 가벼이 여기는 대표적인 동네가 정치권 아닐까 싶다.

소신과 청렴강직함으로 이름 높던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후보 등록을 하기까지 심한 내홍과 우여곡절을 겪은 것도 따지고 보면 단일화에 대한 태도 표변으로 공약을 믿고 지지한 당원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탓이 크다. 그런가 하면 상대 진영이 자해극에 가까운 자중지란을 벌여도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여전히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무리한 방탄 입법과 위인설법, 사법부 겁박을 일삼는 것 또한 수시로 말을 뒤집고 거짓말 논란에 휩싸이는 등 국민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못하고 신뢰를 잃은 탓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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