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이 문걸어 출입 금하고
서적은 구름처럼 쌓여 있네.
관리들 수레 동으로 행차하니
포쇄하라 왕께서 명한 때문.
귀한 책 차례로 열람하니
밝은 햇빛 종일 숲 비추네.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젊은 시절 강원도 '오대산사고'에서 포쇄(曝曬)를 한 경험을 글로 남겼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사고가 소실되자 조선왕조는 실록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산속 깊숙한 곳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세웠다. 그 중 하나가 1606년 오대산 깊은 곳에 지어진 2층 건물 두 채 ‘오대산사고’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안전성은 확보했지만, 습기가 너무 많았다. 종이로 만들어진 실록은 산속 습기에 취약했다. 조선 조정은 2년에 한 번씩 사관을 오대산으로 파견해 책을 꺼내 바람에 말리는 '포쇄'를 시행했다. 당시 사관들은 포쇄를 위해 한양에서 오대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아주 명예롭게 생각했다.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실록박물관)은 오는 5월 1일 실록박물관 전관 개관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통해서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을 30일 공개했다.
2023년 11월 강원도 평창군에서 개관한 실록박물관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실록)과 조선왕조의궤(의궤)의 원본을 선보이는 전문박물관이다. 지난해 7월부터 10개월간의 새 단장을 마치고 이번에 전관 개관하게 됐다. 그간에는 상설전시실을 통해서만 관람객들에게 실록과 의궤를 선보였으나, 새 단장을 통해서 어린이박물관을 비롯해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게 됐다.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5.1.~7.13.)은 40여점의 유물을 중심으로 오대산사고의 설립과 변천 및 쇠퇴 등 역사를 조명한다. 오대산사고 사각은 두 개 층으로 나뉘어 서적이 보관됐는데, 위층인 상고에는 실록 등 중요 왕실 서적이 보관됐다. 사각의 하고에는 의궤와 함께 일반서적이 보관됐다.

아울러 동여도(東輿圖)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등 조선시대 지도와 화첩을 통해 오대산사고를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당시 사람들의 오대산사고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당시 포쇄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들은 포쇄 후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관동지역의 명승을 둘러보곤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오대산사고까지 가는 데는 KTX로 1시간 40분가량이 걸리지만, 과거에는 한양에서 오대산사고까지 가려면 최소 5일은 걸렸다. 당시 사관들에게는 관동을 둘러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그 중에는 추사 김정희도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파쇄 후 들른 강릉 오죽헌에서 ‘심헌록(尋軒錄)’이라는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 방명록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조선 조정은 300년이란 시간 동안 이 같은 포쇄를 통해 실록과 의궤를 지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비극으로 점철된 근대사를 지나오면서 오대산사고와 그 안의 실록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강점기였던 1913년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모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대부분이 화재로 사라졌다. 현재 75책이 남아 있다. 이것들은 1932년 27책, 2006년 47책, 2017년 1책 등 세 차례에 걸쳐서 한국으로 귀한했다.
오대산사고 건물도 한국전쟁 당시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불태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에 이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실록박물관은 상설전시와 함께 앞으로 기획전시, 어린이박물관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서 관람객에게 가까이 다가갈 계획이다. 특히 어린이박물관은 ‘숲속 임금님의 보물창고, 오대산사고’라는 주제로, 고양이, 앵무새, 호랑이, 여우 등 실록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활용해 실록과 의궤의 제작 과정 등을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김정임 실록박물관 관장은 이날 “우리 박물관은 많은 콘텐츠와 관람객 편의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10개월의 리노베이션을 거쳐서 오늘 전관 개관을 하게 됐다”며 “2층에는 기존 상설전시실에 더해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 총 3개의 전시실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실록과 의궤를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발전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