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 사회…저출산 극복의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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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교수
입력 2023-12-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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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교수
[임혜숙 교수]



대학 때 시작된 인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모임이 있다. 내가 졸업한 제어계측공학과가 현재의 전기·정보공학부로 통합되기 전 존재했던 14년 동안 총 10명의 여학생이 입학하여 모두 무사히 졸업했고, 그중 국내에 거주하는 일곱 명이 모이고 있다. 모임 내 나이 차가 최대 여덟 살에 이르지만, 죽이 잘 맞아 모두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나이가 많은 쪽 세 명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고, 젊은 쪽 네 명은 박사 또는 석사 학위 후 국책 연구소와 대기업 등에서 전문직으로 일하고 있다.
 
각자 종사하고 있는 일이나 개성에 따라 관심사도 다르고 대화법도 다르지만, 누구 하나 발언 시간을 독점하는 법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적절히 호응하는 리액션 장인들이 많아, 모임 내내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오랫동안 모임이 지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온 극소수의 공대 여학생이라는 공통점에 더하여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각자의 직업에서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아직도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점인데, IT를 전공한 여성들이기에 직장 내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기회를 많이 부여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전문직 여성 중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싱글이거나, 결혼했어도 자녀가 없거나,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아내의 경력을 지원하고 자녀교육을 포함해 가정에서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담당하는 배우자를 만난 것 같다. 일 예로 위 모임에 속한 후배가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 되었을 때 환영식에서 말한 소감은 “제가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저의 일을 전적으로 지원해 준 배우자에게 감사한다”였다. 이러한 배우자를 만났다는 점은 아이들을 양육하면서도 경쟁이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라우디아 골딘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 소개된 여성의 경력개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노동구조는 ‘시간 요구의 장벽’이라고 한다. 이는 생애 중 어느 시점에 시간 압박이 가장 큰지에 관한 것이다. 30대 중후반에 시간 압박이 큰 직업의 경우, 여성의 생애주기와 맞물려 여성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며, 여성은 커리어와 가정(그리고 자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길목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진에 대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타이밍이 정해져 있고 승진에 막대한 시간 투여가 요구되는 ‘올라가거나 나가거나’와 같은 시스템을 가진 직업은 여성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시점과 ‘올라가거나 나가거나’의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 비슷한 경우가 많고,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는 것을 미루는 경우 아예 가정을 갖지 못하거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가정과 아이를 먼저 이룬 경우 경력에서 이탈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2021년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여성경제활동지수는 OECD 33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며, GDP 대비 모성보호 관련 공공지출 비중은 0.4%로 G5(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평균(1.5%)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여성고용률은 25~29세 71.1%, 30~34세 64.6%, 35~39세 59.9%로, 한국은 G5보다 여성고용률이 낮은데 한국과 G5 간 여성고용률 격차는 25~29세에 5.9% 포인트였으나, 35~39세에는 16.6% 포인트로 벌어진다. 한국의 15세 미만 자녀를 둔 여성의 고용률은 57.0%로, G5 평균인 72.2%보다 15.2% 포인트가 낮다. 한국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로 65%가 육아 및 가사 부담을 꼽았다.
 
최근 주당 근로시간 상한제를 포함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논의가 뜨거웠다. 장시간의 불규칙한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업무는 일과 가정의 균형 측면에서 매우 좋지 않다. 이러한 일자리는 골딘의 저서에서 언급된 ‘가정 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데, 이는 아이를 돌보는 일, 아픈 가족이나 노인을 돌보는 일, 자녀 학교의 요청에 응하는 일 등 가정 내에서 필요한 일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일하거나 소득이 적은 쪽에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 전체의 소득 측면에서 최적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 내 불평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쪽은 여성인 경우가 많고, 이들은 직장에서 인정받거나 경력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이 점점 어렵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조직의 의사결정에 권한을 갖는 관리자급에 여성 비율을 낮추는 것으로 이어져 ‘직장 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여성들이 경력개발의 파이프라인에서 이탈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 사회가 시간과 에너지를 맹렬하게 쏟아부어야 하는 방식의 노동구조가 유발하는 비용을 인식해야 하며, 소득의 감소 없이 개인에게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노동이 조직되는 양식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시간제 고용을 늘리고, 근로시간 조정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을 통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유연한 근로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성과에만 관심이 있는 관리자들이 직원들에게 장시간의 노동이나 불규칙한 노동을 요구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여야 하며,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지원제도 사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조직문화를 혁신하고자 하는 경영자의 의지가 또한 요구된다.
 
세계적으로 드문 심각한 저출산에 더하여 여성 절반의 노동력만을 활용하는 우리 경제는 국제적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부모가 되는 비용에는 보육이나 교육을 위한 드러나는 비용뿐 아니라 경력에 있어 성장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되는 당장은 드러나지 않는 비용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용이 큰 경우 부모가 되는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사회적 돌봄 체계를 구축하여 드러나는 비용을 줄여주는 정책에 더하여, 가정 내 평등한 환경과 가족 친화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노동구조를 제도화하여 여성들이 커리어와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길목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성들이 가정을 이루면서도 직업의 세계에서 경력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만드는 것은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 문제 해결과 지속적 성장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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