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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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용 금융부 부장
입력 2023-11-0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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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경제를 살립시다 캠페인
1993년 '경제를 살립시다' 캠페인

"경제를 살립시다." 얼핏 보면  0%대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2023년 한국 경제를 위한 표어 같다. 하지만 이는 1993년 공중파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됐던 공익광고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6.9%. 7%대에 육박하는 고성장을 이어가고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경제를 살리자'는 공익광고까지 진행했을까.

1980년대 한국이 10%대 넘는 고성장을 거듭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199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30년 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대에 수렴하리라는 것을. 6.9%의 성장률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고성장이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의 위기감과 별개로 1990년대 한국 사회는 고성장의 수혜를 분명히 받고 있었다. "대학 4년 내내 펑펑 놀아도 졸업 때가 되면 과사무실에 유수의 대기업 입사원서가 즐비했다"는 1990년대 초·중반 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의 화려한 무용담(?)은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이 1980년도 대비 저성장을 한다고 위기감을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성장 속도(6.9%)로 사회에 양질의 일자리는 넘치고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만은 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0%대 성장을 이어가는 현재 한국사회 분위기는 어떤가. 취업 문제로만 국한해 본다면 누구나 다 아는 명문대학을 나오고 대학 4년 내내 피나는 '노오력'을 해도 대기업 입사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다.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는 많다는 반론을 할지 모르겠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가 넘은 지 오래된 한국사회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얘기다.

하지만 국민들의 삶은 증가한 GDP만큼 분명히 더 윤택해졌다. 취업을 예전만큼 못할지는 몰라도, 골프장에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부모의 자산을 얼마나 빌렸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영끌'해 수십억원하는 강남 아파트를 호기롭게 사는 2030의 수도 적지 않다. 향후 경제가 더 어려워질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 국민들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의 과실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될 기미가 보이는데도 이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저성장 구조 탈피 해법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히 박히는 수준이 됐다. 굳이 나열해 보자면 △산업구조 혁신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출산율을 높여 생산 가능 인구 확보 △소득분배를 통해 내수 활성화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뻔한 해법을 애써 모른 체하고 있다. 선진국 클럽인 OECD 내에서도 가장 낮은 합계출산율(0.7명), 혁신을 위한 투자는커녕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부동산으로만 쏠리는 시중자금, 갈수록 악화되는 양극화 등 한국 사회는 뻔하지만 명확한 해법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경제 덩치가 커진 만큼 성장률은 둔화될 수밖에 없고, 미·중 갈등과 같은 대외 변수에 저성장이 불가피하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대 경제 대국 미국의 3분기 성장률은 1.2%로 한국(0.6%)의 2배였다. OECD 회원국들의 평균 경제성장률도 3%로 한국의 3배가 넘는다. 한국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장 드러날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쇼크 수준의 낮은 출산율에도 눈앞의 이슈에만 집중하는 정치권.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할 조짐이 뚜렷해졌는데도 고성장 시대가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각 경제 주체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1993년 '경제를 살리자'고 외쳤을 당시 합계 출산율은 1.65명이었다. 대기업 취업이 지금보다 쉬웠을지 몰라도, 중소기업 입사를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 수도 적지 않았다. 사회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소득 5분위 배율은 약 3.8배로 지금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경제가 어렵다"며 위기를 외쳤다. 0%대 저성장, 0.7명의 충격적인 합계출산율 수치를 보고도 비교적 평안(?)한 현재 사람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최근 시내에는 일본 거장 감독이 10년 만에 내놨다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홍보하는 광고판이 자주 눈에 띈다. 제목과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명확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 광고판을 볼 때마다 혹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닌가 싶어 뜨끔할 때가 많았다. 0%대 저성장에 0명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 그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제 우리가 서둘러 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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