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노동시장 '철밥통' 깨부수기 나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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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입력 2023-10-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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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일본 드라마를 보면 늘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나온다. 특히 회사와 관련된 장면에서는 이런 등장인물이 감초 역할을 한다. 이 사람은 이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특별히 바쁜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이 맡아서 하는 별도의 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이 많아서 항상 끼어들고 간섭한다. 그러나 그 간섭이 과히 기분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간섭이 그 조직을 구성하는 많은 구성원들에 대한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여 해결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회사에서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 이 중년의 간섭자는 오히려 다른 조직구성원들의 존중을 받는다. 특히 젊고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 회사원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관심을 보여주고 이들이 더욱 성장해 나가는 데 필요한 소중한 경험(그가 이 회사에 입사한 이후 겪은 산전수전의 그 경험)을 아낌없이 퍼 준다. 이 사람으로 인하여 이 조직은 특정 목적을 위해 모인 무시무시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회사의 목적, 즉 돈벌이와 성장도 동시에 이루어가는 가족 같은 모임으로 묘사된다. 참으로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고도성장기 이후 일본 회사조직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고 지향하고 있던 방향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늘 너털웃음을 웃으며 사방팔방 간섭하는 마음씨 좋은 중년의 그 아저씨는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는 그 중년의 아저씨 같은 존재가 회사에서 해주던 따뜻한 역할, 즉 사람들 간의 관계를 끈끈히 해주고 갈등을 조정해 주면서 단결된 기업조직을 견인하던 그 역할에 대한 향수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고도성장기의 좋았던 시절과 헤어질 결심이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경제가 거의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왔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경제를 구성하는 기업 구성원들의 월급도 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원 입장에서 월급이 한두 해 오르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회사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월급이 이삼십 년 동안, 강산이 바뀌어도 두세 번 바뀔 그 긴 세월 동안 오르지 않았다면 당신의 심정은 어떠할까?

무언가 분노에 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참담한 결과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 제공자에 대해 분노의 칼날을 휘두르고 싶은 갈망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마음씨 좋은 중년의 아저씨가 이들의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아저씨는 회사에서 특별한 직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이 회사에 들어와서 회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또 그 장소를 따지지 않으면서 회사를 위해 일해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특별히 자기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다 해왔기 때문이다.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네럴리스트로 양육되어 왔기 때문이다. 회사가 잘 돌아갈 때 퇴사를 했다면 수많은 꽃다발과 찬사, 그리고 박수 속에서 회사를 떠났을 것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일까, 이들에게는 이제 하는 일 없이 월급이나 축내는 무능한 인간군상이라는 선홍의 낙인이 새겨 있다. 그래도 일본의 회사는 이들을 안고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인고하며 견뎌왔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직원을 덜 뽑고 또 뽑더라도 정식의 회사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잠시 스쳐가는 사람들이 늘고 이들의 비중이 일본 전체 고용자의 거의 40%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 이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를 조소한 것일까,

“파견의 품격”이라는 유명한 드라마가 등장한다. 파견 노동자인 여 주인공이 오히려 정규직의 냉대 속에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파견 노동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회사의 정규직원들을 지켜야 했을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OECD는 회원국의 경제상황을 보고서로 내면서 회원국들 간의 상호 점검과정을 거친다. 필자는 우연히 일본 경제보고서에 대한 검토자로 OECD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때 나온 공통적인 지적이 일본은 정규직에 대한 보호가 너무 강하고 노동시장이 매우 경직적이어서 장기적으로 노동생산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정부 담당자들의 답변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별로 고칠 생각도 없는 듯이 보였다. 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 이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기시다 정부는 일본의 임금인상률이 낮은 것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관광산업이 융성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한다. 그런데 많은 일본의 서민들은 외국 방문객들의 씀씀이에 놀란다. 강했던 엔화의 위엄은 어디로 가고 높았던 일본의 임금 수준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제 남은 건 초라하게 쪼그라든 엔화의 가치와 맨날 그저 그런 월급봉투가 아니던가!

이제 이를 고쳐야 한다.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임금이 올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직원들의 월급을 올려줄 수 있을까? 생산성이 높아야지. 생산성을 올리려면 각자가 자신의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스스로를 교육하고 새로운 세상의 변화에 적응력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제네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를 고용해야 한다. 고용형태를 바꾸어야 한다. 직무급 제도를 기업들도 도입해야 하고 이에는 임금 책정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전문성을 쌓은 직원은 한 회사에서만 일하지 말고 더 높은 임금을 주는 회사로 적극적으로 이직을 해야 한다. 원 소속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득이 된다.

이로써 기시다 정부의 노동개혁정책은 (1)재교육에 의한 능력향상 지원 (2)기업 실태에 맞는 직무급 도입 (3)성장분야로의 원활한 노동 이동을 삼위일체로 하여 이를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연 기시다 정부는 일본 노동시장의 철옹성 같은 관행들(내부노동시장, 직장내훈련, 강고한 정규직 보호, 종신고용과 정년제도 등)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강단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가족 같은 회사!!!. 경쟁과 이익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이런 회사가 계속 존속할 수 있다는 조건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에서 이런 회사는 존속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월급도 오르지 못했다. 이제는 아쉽지만 너털웃음의 마음씨 좋은 중년의 아저씨 같은 존재를 정말로 옛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시다 정부의 노동개혁에 행운을 빈다.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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