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지피지기] 한미일 동맹으로 외교 중심이동 …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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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주간
입력 2023-05-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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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주간]


“각하, 우리 외교의 중심을 중국 쪽으로 조금 옮기시죠.”
1994년 3월 26일 중국 상하이(上海) 신진장(新錦江) 호텔. 김영삼 대통령과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황병태 주중 대사가 마주 앉은 자리에서 황 주중 대사가 그런 말을 꺼냈다. 정 수석이 황 대사 말을 가로막았다.
“대사께서는 주재국에 관한 말씀만 하세요. 외교 전반에 관한 사항은 대사 소관이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3월 26일부터 4박 5일간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막 상하이에 도착했다. 김 대통령은 3월 23일 서울을 떠나 26일까지 3박 4일간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도쿄(東京)~상하이 항로인 ‘상하이 코리도(Shanghai Corridor)’를 통해 상하이에 도착했다. 대통령 앞에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과 황병태 주중 대사 사이에 벌어진 이 날의 해프닝은 당시 이 자리에 배석했던 주중 대사관 외교관이 나중에 전해준 상황이다.
1940년생인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은 1975년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 귀국해서 서울대에서 중국 정치 강의를 맡고, 1980년 ‘마오이즘과 발전(Maoism and Developmet)’이라는 책을 출간한 중국 전문가였다. 1935년생으로 다섯 살 위인 황병태 대사는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에서 ‘유교의 전통과 한국정치-한·중·일 유교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 전문가였다. 두 중국 전문가 간 날카로운 암투에 불편함을 느낀 김 대통령은 “나는 그만 방에 가서 쉬겠다”며 자리를 떴다. 정 수석에게 “주재국에 관한 말만 하라”는 제지를 받은 황 대사는 대통령이 자리를 뜨자 정 수석을 향해 “당신은 대통령의 꼬붕(부하)이지만 나는 대통령의 친구”라는 막말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993년 2월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이 외교안보수석과 주중 대사를 중국 전문가로 기용한 것은 당시 미국이 중국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면서 외교적으로 접근하는 외교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을 베이징(北京)으로 보내 세기의 비밀회담을 통해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중국과 화해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 발상의 대전환을 한 때문이었다. 1976년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수하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권력을 이어받은 덩샤오핑(鄧小平)은 사회주의 경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식 사회주의 시장경제 구축을 통해 빠른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15년째 추진 중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김영삼 대통령 전임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추진으로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했다. 한·중 수교 공동선언은 2300년 한반도 역사에서 대륙 정권과 처음으로 체결한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간 평등조약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는 1905년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본제국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87년 만에 다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교류를 열어 놓았다. 북한은 한·중 수교에 대한 반발로 1993년 3월 13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핵무기 개발 추진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에 벌어진 북한의 NPT 탈퇴와 핵무기 개발 착수는 김 대통령이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담판을 통해 해결해야 할 최대 현안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과 마주 앉은 장쩌민 주석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의 비핵화’를 제시했고, 유엔 안보리를 통한 제재가 아닌 ‘남북한의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선문답(禪門答)만 늘어놓았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발뺌도 했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장쩌민이 제시한 “한반도의 비핵화가 중요하다”는 입장에 동의를 표하는 대답 외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북한 핵문제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을 거치면서 중국 측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해왔고 이제는 워싱턴에 닿을 수 있는 사정거리 1만5000㎞ 미사일 화성17호 발사실험을 목격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왕조 이래로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5년), 한국전쟁(1950년) 순서로 모두 다섯 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서쪽의 명나라만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동쪽의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사무라이(侍) 무신(武臣)계급의 일본 천하통일 여세를 몰아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열어 달라)’를 요청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선조는 일본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2년 전인 1590년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서인 황윤길과 남인 김성일은 요즘 말로 진영 논리에 빠져 서로 다른 보고를 했다. 결과는 일본이 바다를 건너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고, 전쟁 대비도 하지 못해 7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당시 선조는 외교의 중심을 서쪽의 명에 두고 있었다가 한양을 탈출해서 명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까지 도망가는 참상을 보여주었다.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아이신쥐에루오(愛新覺羅·금(金)이라는 뜻의 만주어) 누르하치가 1616년에 여진족을 통일해서 건국한 금나라가 1636년 청(淸)을 건국해서 명을 대체해나가는 과정에서 만주족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친명배금(親明排金) 노선의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을 침공한 청 황제 아이신쥐에루오 황타이지(皇太極)가 직접 4만5000의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공격해서 인조를 굴복시키고 수많은 노예와 부녀자들을 포로로 끌고 간 전쟁이었다.
현대 중국에서 ‘병자노란(丙子虜亂·많은 노예를 포로로 획득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의 명칭을 우리는 지금도 ‘병자호란(丙子胡亂·병자년에 오랑캐들이 침공한 전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친명배금 논리가 현재까지 이어져 명·청에 대한 인식 전환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호(胡)’란 중국 한족(漢族)들이 대륙의 서쪽에 사는 오랑캐 소그디언(Sogdian)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황타이지의 침공 38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대륙 정권에 대한 사고의 중심을 명에서 청으로 옮기지 않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직후 우리가 병자호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중국 지식인들은 “그럼 청 왕조를 승계한 우리도 호(胡)란 말이냐”고 말하는 아이러니를 빚었다.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의 기본 성격은 1년 만에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下關) 강화조약 제1조를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청 흠차전권대신 리훙장(李鴻章)이 1895년 3월에 서명한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1조는 “중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선이 그동안 중국에 대해 해오던 조공의 전례는 폐지한다”고 돼 있다. 청일전쟁의 목적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오던 중국에서 조선을 떼어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한 조약이었다.
러일전쟁의 결과 역시 일본의 승리로 귀결됨으로써 1905년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의 제2조도 러일전쟁의 목적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어졌던 전쟁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조약의 제2조는 “러시아제국 정부는 조선에 대해 일본제국이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데 동의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킨 다음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이 두 전쟁의 결과 조선왕조는 일본제국과 한 판의 전쟁도 치르지 않고 자주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치욕을 겪게 된다.
1950년 6월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북한·중국과 한국·미국·유엔군 간 전쟁이었다. 중국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1년 만인 1950년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의 결과 형성된 동북아의 냉전(Cold War)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마오쩌둥의 중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승리로 귀결됐다. 그러던 국제정치 구조는 다시 50년이 흐르는 사이에 2022년 2월 러시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러시아·중국과 미국·유럽이 대치하는 신냉전으로 변질됐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한·중국·러시아와 한국·미국·일본이 대치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지난해 5월 10일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전임 문재인 정부가 사드(THAAD) 배치를 유보시키고 중국을 ‘높은 산’이라고 부르면서 다소 중국으로 추가 기울어져 있던 외교의 중심을 미국과 일본 쪽으로 끌어당기는 중심 이동을 추진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윤 대통령은 만찬 때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라는 미국적인 노래를 부르고 유창한 영어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등 미국 중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그늘에서 지난 40여 년간 취해온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외교노선에 따라 중국에 진출했던 삼성 시안(西安)과 우한(武漢)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공장들은 인질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미국은 두 공장이 첨단 기술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미국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내 시장이 닫혔을 때 삼성 시안 반도체 공장과 SK하이닉스 반도체 제품이 중국 시장을 메우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FT(파이낸셜타임스) 보도도 있었다.
외교의 중심을 옮기는 것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판단이라 하더라도 외교의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인질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미국 측과 보다 적극적인 협상을 벌여 구제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치가 아닐까. 그렇게 못한다면 과거 조선시대에 외교 중심의 이동에 실패해서 빚어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수많은 백성들에게 인명 상실과 포로의 비참함을 겪게 한 선조와 인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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