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강대국 눈치 안 보는 실리외교 …룰라와 함께 브라질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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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3-04-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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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 3월 20일 브라플질리아 플라나우투궁에서 빈곤층 의료 지원 대책에 대한 연설 도중 손가락으로 얼굴을 만지고 있다. [AFP 연합] 

브라질에서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78)의 3기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 지났다. 그가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임 대통령을 '50.9%대 49.1%'라는 근소한 차이로 결선투표에서 승리하면서 불안한 출발은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룰라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궁 등에 난입해 군의 구데타를 촉구하며 폭동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년 전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의 복사판처럼 진행된 이번 사태로 좌우로 극명하게 분열된 브라질 정치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또 12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에게 민심 통합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임을 일깨워 줬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이 같은 폭거에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세력들도 충격을 받거나 실망하면서 이번 사태가 오히려 룰라 대통령의 국가 통합 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룰라 대통령은 1·8 폭동 사태와 관련해 군 내부에 공모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즉각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군부 숙청과 함께 군부 달래기의 양동 작전이다. 2019년 대통령에 취임한 육군 대위 출신 보우소나루는 재임 중 군 출신 인사 6000여 명을 정부기관에 임명해 군부 독재 시대의 향수에 빠진 극우 성향의 정치를 폈다. 룰라는 지금까지 군 출신이 꿰차고 있던 100여 개 정부 요직을 민간인 출신으로 교체했다.  또 군부의 정보기관 통제권을 대통령 비서실장실로 옮겼다. 또 지난해 말 보우소나루가 임명했던 줄리우세자르 지 아루다 육군참모총장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토마스 미게후 리베이루 파비아 육군 동남부사령관(62)이 발탁됐다. 파비아 신임 육군총장은 임명 직전까지도 보우소나루의 대선 패배를 한탄했던 인물이었지만 자신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10월 대선 결과를 존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난 2월 룰라 대통령은 아마존 야노마미 지역에서 불법으로 일하고 있는 광부 2만명을 추방하는 작업에 군부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보우소나루 지지자들로 가득 찬 브라질 군부에 대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브라질 민정 이양 이후 최대 폭거 

브라질에서는 군부가 네 차례 구데타를 통해 집권한 사례가 있다. 가장 최근은 1964년으로 군부는 노동당 출신 주앙 굴라르 대통령을 몰아내고 약 20년에 걸쳐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기 브라질은 인권과 민주주의 탄압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 공업화와 고용 확대 등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면서 지금도 상당수의 브라질 국민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3월 31일을 '위대한 자유의 날'로 정하고 군부 독재정권의 강력한 민족주의와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새 정부 출범 후 브라질 군부는 보우소나루가 부활한 쿠데타 기념일 행사를 취소했다. 1985년 브라질의 민정 이양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 폭거로 기록되고 있는 1·8 폭동과 관련해 현재 일부 군인들이 시위대의 폭력을 방관하거나 동조했다는 주장에 대해 군 당국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금속 노동자 출신으로 2003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어 2007년 연임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은 1·2기 재임 기간 이념적으로 좌파지만 일견 신자유적인 경제정책으로 진보 노선보다는 중도 노선 정책을 펼치면서 빚더미에 있던 브라질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군부와도 대체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보소나루가 근소한 표차로 패배한 후 군의 개입을 통해 대선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파 지지자들의 집회가 폭동 사태로 까지 이어지면서 룰라 정부는 민주주의 수호와 군부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 의회는 룰라 지지세력들을 중심으로 군부의 권한과 역할을 좀 더 명확히 규정하는 방향으로 연방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 군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확고한 입장은 군부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룰라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브라질 대선 과정에서 브라질 군부에 미국에서 무기를 구매하거나 미군의 협력을 바란다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1·8 폭동 발생 직후 바이든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을 미국으로 전격 초청했다. 룰라와 정상회담을 한 후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 브라질 모두 민주주의가 이겼다"며 두 나라가 민주적 선거에 따른 평화적 권력 이양을 부정하려는 폭력을 규탄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절친으로 알려진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임기 종료 직전 미국 플로리다로 돌연 출국했다가 3개월 만에 지난주 고국으로 돌아왔다. 브라질 당국은 1·8 폭동의 배후 역할 등 몇 가지 혐의에 대한 수사를 위해 강제 소환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자신의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보우소나루는 귀국 후 현 집권 세력의 뜻대로 국정이 펼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지지자 결집에 나설 전망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브라질 정치권은 다시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극우적 성향의 보우소나루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하여 지난 2월 룰라의 미국 방문은 양국 관계 개선의 주요 이정표로 평가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과 베네수엘라 등 남미의 반미 국가들과 빚고 있는 갈등과 마찰에 룰라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 집권 시 무너진 글로벌 네트워크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제외교 무대에서 노련한 중재자로서 룰라의 역할이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미국과 브라질은 기후변화 문제를 빼곤 국제적 공조가 필요한 여러 분야에서 서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룰라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의 바람과 달리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다. 특히 룰라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의 중재를 위해 인도나 인도네시아 등 참비동맹 국가들이 참여하는 소위 'Peace Club'을 주도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룰라는 또 최근 격화되고 있는 미·중 간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이미 브라질의 최대 무역 파트너로 양국의 무역 규모는 미국과 브라질의 거의 2배에 이르고 있다. 


국제무대 중재자 룰라의 광폭 행보 


좀처럼 해외 순방에 나서지 않았던 보우소나루와 달리 룰라 대통령은 취임 후 국제 외교무대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첫 방문국으로 이웃 나라인 아르헨타나를 찾아 양국 간 우호협력을 다졌다. 2월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 두 달 만인 이번 달 11~14일 폐렴 증상으로 방문이 연기되었던 중국을 찾아간다. 룰라는 방중 기간 교역 강화 및 교육·과학기술 교류안 등 20여 건의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다. 룰라의 방중을 앞두고 브라질과 중국은 수출입 결제와 금융거래 등에 달러 대신 자국 통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해 중국의 달러 패권 도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번 방중은 전임자인 보우소나루와 달리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과 우호 관계를 재개하려는 룰라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시진핑도 자신의 3기 출범 이후 첫 외빈으로 룰라를 초청한 것은 중국이 브라질과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취임 후 보우소나루 정권에서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던 베네수엘라에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표단은 미국에 의해 좌파 독재자로 낙인 찍힌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비롯한 야권 인사와도 회동했다. 브라질은 또 2007년부터 니카라과를 철권 통치 중인 다니엘 오르데카 대통령의 야당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유엔의 결의안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룰라 정부는 또 지난달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군함이 리우 항에 정박하도록 허용했다. 이란 군함의 정박 시점이 룰라의 미국 방문 직후 이루어진 점을 보면 브라질이 서방과 반서방의 대결 구도에서 어느 한쪽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을 위해 브라질 독자적으로 실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룰라 3기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활동 반경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이나 서방의 바람과 달리 브라질은 전통적인 비동맹 원칙에 충실한 모습이다. 미·중 강대국 눈치를 보지 않는 브라질의 대외정책 배경에는 민족자결, 불간섭, 국제협력과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브라질의 외교적 원칙을 명시한 1988년 제정된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원칙에 입각한 브라질의 행보에 대해 서방 세계는 브라질에 눈쌀을 찌푸리고 있지만 룰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제질서의 복합적인 경쟁구도에서 실리 외교를 바탕으로 국가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모습이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사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로 달라진 브라질의 높아진 위상이다. 브라질은 주요 광물과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내수 중심 경제라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룰라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고 국내에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브라질의 오랜 희망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꿈만은 아닐 듯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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