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97년 5월 7일 뉴욕 맨해튼 51번가 에쿼터블 센터 35층에선 세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블루'와 인간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1963~)간의 결승전. 카스파로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전 세계 체스판을 평정했고 그를 기계가 이길 가망성은 전혀 없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전 세계에 송출된 이 대국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기계로 만든 지능이 인간 천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였다.

대국이 시작되고 1시간 정도 경과했을 때 백을 쥔 딥블루가 외통수 Checkmate를 불렀다. 허를 찔린 인간 대표는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손을 들었다. 19수 만에 챔피언이 기계에 굴복한 것이다. 6번의 대국에서 딥블루는 2승3무1패로 체스 황제의 무릎을 꿇렸다. 카스파로프가 치른 대국 사상 최단시간 패배였다. 현역 세계 체스챔피언이 토너먼트 방식의 정식규정 시합에서 기계에게 패한 최초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공지능(AI) 역사에 새로운 한 줄이 더해졌다.

IBM은 1989년 딥블루의 원형 ‘딥소우트(Deep Thought)’를 개발한 이들을 영입해 완벽한 체스 AI 개발에 몰두했다. 이 승리로 당시 세계 슈퍼컴 랭킹 259위에 불과했던 200만 달러짜리 딥블루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셀럽이 됐고 IBM은 수십억 달러의 경제 효과를 창출했다. 딥블루의 승리가 당시 빈사 상태의 IBM 메인프레임 사업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대전 이후 딥블루의 후광을 받은 RS/6000은 대형컴퓨터의 대명사가 되었다. IBM으로부터 PC부문 1위 자리를 빼앗아 간 컴팩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도 성공했다.

지적 스포츠라 불리는 체스게임은 고도의 판단, 추론 예지력을 필요로 한다. 이 게임에는 수십억개의 기보가 존재하며,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오판하도록 유인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AI 개발자에게 인간 체스 챔피언을 이길 수 있는 AI를 만드는 것이 오랜 과제였다.

AI 체스 선수를 가장 먼저 생각해낸 과학자는 앨런 튜링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즈음해서 컴퓨터의 원형이 등장하기도 전에 간단한 AI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나 그 당시에는 그의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는 충분한 연산능력을 지닌 컴퓨터가 없어 무위의 기술로 남아야 했다. 튜링의 염원은 체스 두는 기계 최강자를 가리는 '세계 컴퓨터 체스 선수권 대회’로 이어졌다. 1974년 스톡홀름에서 처음 개최된 이 대회를 계기로 AI 산업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대회가 배출한 슈퍼스타가 '딥소우트'라는 AI였다. 

딥소우트는 1988년 체스 그랜드 마스터, 불린 벤트 라슨(1935~2010)을 꺾고 인간 체스 고수를 이긴 첫번째 AI로 이름을 날렸고 1989년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열린 6번째 컴퓨터 체스 대회에서 우승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딥소우트도 1989년 세계 체스계를 정복한 게리 카스파로프와의 대결에서 패배, AI의 한계를 드러냈다.

딥소우트를 개발한 카네기멜론 대학의 팽 쑹수(1959~) 교수와 그의 제자들을 눈여겨본 회사는 IBM이었다. IBM의 경영진은 딥소우트를 좀 더 개발해 챔피언을 이기면 엄청난 흥행몰이가 될 것을 직감했다. IBM은 딥소우트 개발팀을 '왓슨 연구센터’에 영입, 딥소우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딥블루’를 개발했다. 카메기멜론 팀은 1996년 딥블루 팀으로서 다시 카스파로프에게 도전했지만, 결과는 1승 3패 2무로 인간의 승리. 이듬해인 1997년 위와 같이 복수전에 성공, AI의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다.

◆ AI와 인간의 대결?…진정한 승자는 AI를 개발한 인간
 

게리 카스파로프(오른쪽 아래 모니터)와 IBM 딥 블루 대결 당시 장면 [사진=연합뉴스]


승리는 AI가 했지만 진정한 승자는 이 AI를 개발한 인간이다. 딥블루의 승리로 AI가 얻은 것은 명성뿐, 실익은 팽 쑹수 교수팀과 IBM에게 돌아갔다. 딥블루의 승리 이후, 슈퍼 컴퓨터 산업이 급격히 발달, CPU 등 하드웨어 성능이 개선돼 딥러닝 알고리즘이 급속히 발전됐다. 그 결과, 2011년에는 IBM 슈퍼컴퓨터 왓슨이 제퍼디란 퀴즈대결에서 우승해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고, 2012년에는 머신 러닝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힌튼 교수가 개발한 토론토 대학의 '슈퍼비전'이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인간을 상대로 압승했다. 2013년과 2014년엔 일본 AI 벤처기업 헤로즈의 장기 대결 승리가 이어졌다. 2016년에는 AI 대표선수 알파고가 바둑황제 이세돌에 압승하면서 AI는 국가 경쟁력의 '필수템'으로 등극했다.

AI의 ‘도장깨기’는 개발자들의 마케팅, 투자유치 등 경제적 목적이 그 배경에 있었다. 그래도 일부 호사가들은 이를 확대해석하곤 했다. 그들은 AI가 인간 천재들을 차례로 물리치자 ‘AI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비전을 살포했다. 말주변 좋은 이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의 서막’이란 멋진 레토릭을 올리며 모두가 아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암울한 미래 세계를 현실에 투영하며 즐거워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계가 사람의 두뇌를 이긴다’는 것과 ‘기계가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라는 것이다. AI 기술의 발달사를 반추해 보면 AI는 반도체 집적도와 컴퓨터 성능의 발달에 따라 발전해 왔다. 따라서 인간의 특정 지력을 능가하는 AI의 등장은 시기의 이슈만 있었을 뿐,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IBM의 슈퍼컴퓨터가 체스 천재를 대국에서 이긴 것과 알파고의 승리는 그 시기의 기술 수준을 대변하는 현상이다.

딥블루는 결코 사고를 한 적이 없다. 딥블루는 수많은 체스 기보를 광대한 반도체 칩 속에 빈틈없이 저장해 놓고 특정 상황에 내다 쓰는 단순 작업을 하도록 전기적 신호를 입력해 놓은 바보 상자였던 것이다. 딥블루는 단순한 연산기계일 뿐이어서,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최적의 ‘경우의 수’를 찾는 작업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던 것이다. 상대방의 취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카스파로프와 달리 말의 위치에 대해 ‘사고’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IBM의 경영진은 “딥블루의 승리는 AI를 프로그래밍 한 인간의 몫이며 인간의 승리”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사고의 영역은 아직도, AI가 인간의 지력을 능가하는 특이점이 오더라도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다. AI는 연산능력으로 모든 것을 대변하지만 인간에게 연산이란 뇌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능력일 뿐이다. 복잡한 연산이 필요할 때는 기계의 능력을 차용하면 그만이다. 커즈와일이 상상하는 ‘사람을 능가하는 AI’가 등장하려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논리회로가 필요한데, 아직 천재 개발자들조차도 그 회로가 어떤 건지 상상도 못하고 있다.

◆ 로봇에 진심이었던 아톰의 후예들
 

소니 AI 로봇 '아이보' [사진=소니 웹사이트 갈무리]


일본의 소니는 1999년 AI가 탑재된 애완용 로봇 아이보(AIBO)를 발매, 첫해에만 4만5000대를 완판했다. 아이보는 학습을 통해 행동을 개선하면서 마니아 층을 모았을 정도로 큰 인기가 있었다. 소니가 2006년 아이보 사업을 철수하고 판매를 중단한 이후 아이보 장례식이나 고장난 아이보의 부품을 거래하는 아이보 장기 시장이 생길 정도로 아이보와 오너들은 '교감'을 했다. 

아이보가 AI 역사에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 로봇 강아지의 출현으로 AI의 물리세계 정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자연스러운 활동을 하려면 구조화되지 않은 환경(Unstructured Environment)에서 자기연행(Self-Performing)을 할 수 있는 자율로봇(Autonomous Robot)이 돼야 한다. 기존 로봇은 일방향적 명령을 통한 제어가 이루어졌지만 자율로봇은 쌍방향 통신에 의해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하다.

아이보는 2018년 CES 무대에서 부활했다. 돌아온 아이보 7세대는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학습능력을 강화하고 다른 사용자와 아이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학습해 적응하는 방식으로 자율성이 진화했다. 소니는 "아이보와 주인과의 유대관계를 위한 업데이트를 지속해 완벽한 자율로봇으로 진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세계 산업용로봇시장의 45%를 점유하고 있을 정도로 로봇에 꽂혀 있는 국가이다. 일본인들이 로봇에 열광하는 데에는 1952년부터 1968년까지 방영한 국민만화 아톰(국내명 '우주소년 아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2000년 일본 혼다가 선보인 2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ASIMO)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물을 따라 주는 등 놀라운 동작을 선보였다. 아시모 개발 역사는 일본이 미국과 플라자 합의를 한 후 엔화 가치가 치솟던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혼다는 제트기 엔진과 로봇 분야를 새로운 수종 사업으로 선정하고 그 해 'E0'라 명명한 이족 보행 로봇 시제품을 선보였다. 그후 6개의 프로토타입 개발을 거쳐 2000년 연구소 내에서 자연스러운 이족 보행에 성공하면서 '아시모' 1세대를 발표한 것이다. 2005년에 선보인 2세대 모델은 시속 6㎞로 달릴 수 있었다. 2007년에는 다수의 아시모 로봇과 협력하여 방문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신기술과 스스로 충전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 되었다. 후속 세대 아시모는 빨라진 이동 속도와 불규칙한 표면 걷기, 길 안내, 공 차기, 계단 오르기, 뛰기 등 동작으로 인간 움직임을 더 많이 닮게 됐다. 하지만 2016년 미국에선 아시모를 초라하게 만들 막강한 경쟁자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등장했다.

2017년 보스턴 다이내믹스 '아틀라스'가 울퉁불퉁한 길을 걷고 외부 충격에 맞서 자세를 제어하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담은 데모 영상이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졌다. 아틀라스는 무릎 높이 이상의 점프를 하고 백 덤블링까지 돌았으나, 당시 아시모의 퍼포먼스는 그 당시 휴머노이드에겐 기본기 수준이었다. 2018년 5월 아틀라스는 울퉁불퉁한 벌판을 사람처럼 달렸는데, 속도도 실내에서 달리는 아시모보다 훨씬 빨랐다. 인간의 힘든 일을 대신하는 것이 목적이라던 아시모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국의 아이로봇이 만든 '팩봇'이 원전사고 수습에 투입됐다. 이쯤 되자 혼다에게 아시모란 자랑거리가 아니라 기술적 무기력함의 상징이 됐다. 2018년 6월 28일 혼다는 아시모 개발 중단을 선언하고 연구팀을 해산했다. 

아시모를 사라지게 한 아틀라스 또한 퇴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징후가 얼마 전 포착되었다. 올해 9월 30일 테슬라의 AI 데이에 등장한 최신 로봇 옵티머스가 보인 움직임은 손 한번 흔들어 준 게 전부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테슬라 로봇은 실망 그 자체였다. 현대자동차가 인수한 보스턴 다이내믹스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능가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옵티머스 개발자의 한 마디. “그들(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에는 뇌가 없습니다.” 이 행사에서 테슬라는 완전자율주행(FSD)을 실현한 노하우를 로봇 AI에 적용했다. 로봇이 딥러닝을 통해 움직임이 빨라지고 자연스러워지는 ‘점증적 성장 모델’을 채택했다. 데이터가 축적됨에 따라 자연스러운 이족 보행과 정교한 손동작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장 부품 조립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을 투입하는 공정에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을 투입해 무인 공장을 만들면 다른 자동차 회사는 생산성, 가격 경쟁력에서 테슬라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뛰고, 구르고, 공중제비까지 선보이는 헬스보이 아틀라스. 너무 멋지지만 이 로봇은 앞으로도 용처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2, 3년 뒤, 옵티머스가 학습을 통해 아틀라스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몸놀림을 선보일 즈음, 아틀라스도 아시모처럼 쇼 단원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혹시, 지금 현대자동차 그룹도 아틀라스에 AI를 붙이는 연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강시철 비엔씨티코리아 회장 [사진=강시철 비엔씨티코리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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