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교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지 6개월이 지났으나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중국은 중화 제국적 질서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미국은 반중(反中)연대 구축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민주주의국가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미-중과 미-러의 갈등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유엔의 집단안보체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고 있다. 이리하여 어느때보다 국가간의 안보협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영향을 받는 국가에서 영향을 주는(influential) 글로벌 중추국가로의 도약’은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외교·안보 분야 국정 목표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해 평화의 한반도를 만들고,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 강화를 주도하고, 외교와 국방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겠다는 생각이다. 취임 11일 만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미동맹을 한반도를 넘어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글로벌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이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초청받은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더 큰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번 달 초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계기로 중국이 미국을 비난하고 대만을 포위하는 형태로 실탄사격을 수반한 군사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10일 중국 정부가 22년 만에 발표한 대만백서는 평화적 통일과 통일 후 제도가 다른 대만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면서도 대만의 독립과 외부 간섭에 대해서는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혔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기에 윤석열 정부가 가장 두드러지게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 대일 외교다. 한일 간의 당면한 최대 과제라 할 수 있는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박진 외교장관은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이전에 바람직한 해결방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일본 기업이 원고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면담에 응하고 사죄하지 않으면 현금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식민지 지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이날 도쿄에서 열린 전몰자추도식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1994년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깊은 반성’을 추가한 이후 역대 총리에 의해 답습되었던 이 표현은 제2차 아베 정권 등장 후인 2013년부터 10년 연속 사용되지 않았다.
 
지난 8월 17일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강화할 때 양보와 이해를 통해 과거사 문제를 원만하게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피력했다. 윤 정부 출범 이후 일본이 한국과의 외교적 대화를 시작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것이 한국에 대한 기존 일본 정부의 방침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대법원판결 집행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방안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지 않는다. 다양한 레벨의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 정부의 뜻을 일본 측에 전달하고 신뢰를 쌓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 간의 상호존중과 협력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공통의 인식이 없다면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는 짝사랑에 그칠 우려도 있다.
 
이제는 현실성이 없는 ‘현금화 이전의 조기 해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현금화’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한일관계의 파국을 회피하기 위한 ‘가드레일’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필자는 현금화한 자산을 한국 정부가 매입하여 일본 기업에 돌려줘서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대신 일본 기업이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노력에 상응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도 필요하지만, 피해자 측의 아픔에 공감하려는 우리 정부의 자세와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쇼’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때로는 목표 달성을 위해 쇼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외교·안보 역할을 강화겠다는 기시다 총리와 글로벌 중추국가를 만들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책임 있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주도하고 미·중의 갈등 공간을 줄이는 외교적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양국의 국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양국의 외교적 운신의 폭도 넓힐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조진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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